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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골인 바트게렐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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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동 ‘플라워이음’은 2012년 삼성그룹이 설립한 비영리 공익법인 사)글로벌투게더경산이 결혼이주여성의 행복한 일자리를 위해 운영하는 꽃집이다. 공원교 근처에서 카페와 겸하다 서상동으로 옮기면서 꽃집으로만 운영되고 있다. 몽골에서 온 바트게렐(송지현, 43) 씨는 사회적기업 글로벌투게더경산이 출범하던 해에 인연을 맺고 지금까지 플라워이음을 지키고 있다. 스물일곱에 만난 남편과는 1년간 장거리 연애하다 결혼에 골인, 경산에서 15년째 결혼생활을 하며 슬하에 중학생 두 딸을 두었다.
한국에는 언제 어떤 계기로 오시게 됐나요?
가장 친한 대학 동기가 한국인과 결혼했는데 한국이 살기 좋다고 자기 신랑 친구를 소개해줬어요. 그때 저는 사회생활도 안 하고 공부를 좀 오래 하고 있었어요. 경영학과에 다니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서 다시 간호학과에 진학했거든요. 몽골에서 한국인과 결혼하는 게 유행하던 때이기도 했지만 친구가 그냥 좋은 사람 있으니까 한번 만나 볼래? 해서 소개를 받은 거죠. 1년 정도 연애했는데 한국말 진짜 열심히 공부했어요.
원래 한국어나 한국 문화에 관심이 있으셨나요?
K-드라마가 워낙 인기 많던 때였고 제가 한국식당, 옷가게, 화장품 가게 이런 데서 아르바이트도 많이 해서 한국 사람들하고 되게 친했어요. 주변에 한국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그 친구에게 소개받아서 세 명이 동시에 결혼하고 한국에 온 거예요. 그 친구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까지만 해도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한국에 가서도 계속 연락이 와서 너무 좋다고 오라고. 한국 음식도 워낙 좋아해서 집에서 몽골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이 거의 없어요.
남편과의 연애 스토리가 궁금하네요
연애를 진짜 재미있게 했어요. 거의 1년을 메시지 보내고 전화하고. 신랑은 결혼 안 해주는 줄 알았대요. 그런데 저는 첫눈에 반했거든요. 키도 보통이고 잘생긴 건 아닌데 첫인상이 너무 따뜻해서 좋았어요. 신랑이 저보다 더 몽골 사람 같이 생겼거든요. 저는 오히려 사람들이 한국 사람으로 보기도 해요. 제 성격이 좋으면 좋은 거라서 밀당도 안 했어요. 다만 신랑이 저보다 아홉 살 많아서 나이 차가 너무 난다는 생각은 했어요. 그런데 제가 마흔이 넘고 보니 그때 서른일곱이 너무 젊은 거예요. 왜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지?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요. 신랑이 전기 기술자라 이음 전기공사도 다 해줬어요.
몽골의 가족들은 국제결혼을 반대하지 않으셨는지?
부모님이 처음에는 허락을 안 하셨어요. 멀리 보낸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으니까. 한국 사람과 결혼한다는 건 상상도 안 해본 일이었죠. 아빠는 결혼식에도 안 오신다고 했었어요. 한국 드라마에서는 시어머니가 너무 무섭게 그려지잖아요. 내 딸 고생시킬까 봐 그렇게 걱정하셨대요. 그런데 와보시고 제가 너무 잘 살고 신랑도 너무 좋고 시댁도 좋으니까 지금은 좋아하세요. 신랑 보고는 진짜 몽골 사람 같다고, 말이 안 통해서 그렇지 외국 사람 같지 않대요. 오빠들은 외국에서 유학해서 요즘 세상에 국제결혼이 무슨 문제냐고 사람만 좋으면 된다고 아빠를 설득해줬어요. 엄마도 네가 이렇게 누구 좋다고 한 게 처음인데 정말 좋은가 보다 하셨죠.
한국에 나와 있는 다른 가족들은 없나요?
둘째 오빠 아들이 대경대학 호텔 관련 학과에서 유학하고 있어요. 고모가 여기 있으니까 믿고 보낸 거죠. 저희 애들 어릴 때 여동생이 와서 영남대에서 2년 정도 공부했는데 자기는 고향에서 살고 싶다고 갔어요. 여동생이 예뻐서 소개해달라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외국에서 사는 게 쉽지는 않잖아요. 저는 성격이 외향적이어서 괜찮지만 동생까지 잡고 싶지는 않았어요. 지금은 몽골에서 결혼하고 애 키우면서 잘 살아요.
간호대를 나왔는데 전공과 전혀 다른 일을 하시네요.
1년만 더 공부하고 졸업하길 원하셨는데 제가 한국 가서 공부하겠다고 고집부렸어요. 한국어 좀 되면 공부해야지 했는데 애 낳고 키우느라 시기를 놓쳐버렸네요. 그러다 이음에서 일하게 됐고요. 아이를 낳으면 마음이 힘들고 불안한 게 있거든요. 내가 아이들에게 뭘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싶고. 뭐라도 해야지 집에만 있으면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았어요. 일하는 엄마가 보기 좋을 거야 이러면서 애들 세 살, 네 살 때 경산시다문화가족지원센터 소개로 플라워이음에 들어왔죠. 내가 원해서 시작한 일이니까 신랑한테 힘들다고도 못하고 그래서 더 오래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생활비를 보탠다든가 이런 게 아니라 내 만족을 위한 거니까. 그리고 저 완전 T(MBTI)라서 외롭거나 힘든 거 잘 몰라요. 하하.
한국에 와서 또 하나의 가족이 생겼습니다
시댁분들이 진짜 좋아요. 시누이만 네 명인데 여동생들이 오빠랑 결혼해 줘서 고맙다고 해요. 아버님 돌아가시고 어머님은 지금 요양원에 계시는데 신혼 때는 시골에 가고 이런 게 진짜 좋았어요. 멀리서 온 며느리가 알아서 잘 사니까 예쁘게 봐주셨어요. 시댁은 제사를 1년에 명절까지 여섯 번 지내거든요. 아버님도 외동이라 고모가 여섯 분인데 제사 때면 다 오셔서 저를 예뻐하셨어요. 현아, 현아 하시면서. 어머님이 아프시면서 10년 전에 제사를 저희가 갖고 왔거든요. 신랑이 좀 보수적이고 저도 잘하는 게 없으니 제사라도 잘 지내자 했어요. 제사 지낸다고 했을 때 싫지 않았어요. 한국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지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어머님이 안 아프셨으면 애들도 더 자주 보시고 반찬도 해주고 하셨을 텐데 그건 좀 아쉬워요. 요양원 모시기 전에는 아들딸 돌아가며 모셨어요. 여동생들이 오빠만 하라는 법 없다고 형편 되는 사람이 모시자고. 그러면서 이렇게 힘든 걸 그동안 아무 소리 없이 모셔줘서 고맙다고 했어요.
몽골과 한국의 가족문화나 정서가 다른 게 있다면?
결혼한 자식에게 바라는 게 없어요. 우리집에 며느리가 세 명인데 진짜 딸 같이 대하거든요. 엄마, 아빠가 내 딸들이라고 하시고 올케들도 그만큼 부모님께 잘해요. 몽골은 제사 문화가 없어요. 죽은 조상한테 음식을 올리거나 이런 게 없어요. 불교국가니까 초 켜고 향 올리고 그런 것만 하죠. 또 한국은 쌀을 많이 먹는데 몽골은 밀이 주식이거든요. 그런데 저는 쌀을 더 좋아해서 오빠가 너는 원래 성격도 그렇고 거기하고 더 맞나 보다 하죠.
송지현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얻게 되셨나요?
고모님이 신랑을 되게 예뻐하세요. 조카가 외국인하고 결혼한다니까 절에 가서 이름을 두세 개 받아오셨더라고요. 그중에 제일 예쁜 이름을 제가 골랐죠. 제 이름이 정말 좋은 이름이 맞나봐요. 한국에 와서 힘든 거 진짜 없었거든요. 애기 둘 키우면서 어머니 모시고 이럴 때 잠깐 힘든 건 있었지만 지나가면 다 까먹어요. 잘 모셔드려야 저도 마음이 편하고 신랑한테도 좋으니까.
경산에서만 사셨는데 어떤 곳이라고 느끼시나요?
다른 도시를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경산이 좋은지 나쁜지 비교를 못 하겠어요. 약간 시골이긴 한데 대구와 붙어 있으니까 시골 느낌은 안 나고. 집이 중산지구라서 대구 쪽으로 놀러 갈 때가 많기도 하고 시골이라는 느낌은 안 들지만 운전하기 편해서 좋아요.
아이들에게 엄마의 고향은 어떤 의미일까요?
부모님은 울란바토르에 계시는데 엄마는 잘 있으니 전화도 안 하나보다 하시고 아빠는 좀 기다리시죠. 애들도 좀 컸으니까 이제 자주 가려고요. 어릴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갔지만, 이제는 자기들이 가고 싶어 해요. 작년에 갔다 왔는데 큰애는 몽골 하늘이 너무 예쁘다고 구름도 너무 하얗고 하늘이 머리 가까이 있는 것 같대요. 대구, 김해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도 있어서 세 시간이면 가요. 아이들한테 몽골어를 못 가르친 게 가장 아쉬워요. 내가 한국어만 쓰니까 생각도 한국말로 하게 되고 애들이 여섯, 일곱 살 무렵 가르치려고 하니까 이미 외국어로 받아들여서 싫어하더라고요. 딸이 한국 사람은 한국말 해야지 이래요.
플라워이음에서는 어떤 일을 하시나요?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이음 오픈 준비할 때 열 명이 일을 배웠어요. 그중에 저 포함 네 명이 취업했죠. 대구대에 카페 열었을 때 거기서도 일했어요. 저는 식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고 몽골에서는 식물을 이렇게 많이 키우지도 않거든요. 하지만 꽃이 예쁘니까 좋았어요.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근무하는데 꽃다발 예약 있으면 만들고 직접 배달도 해요. 일주일에 두 번은 대구 칠성시장 가서 꽃 사고, 지물, 화분 같은 부자재도 사고요. 또 매장 안에 식물 관리하고, 어떤 스타일이 유행하는지 공부도 합니다. 안목을 길러야지 아니면 자기 스타일로만 만들게 되거든요. 요즘은 플랜테리어가 유행이라서 화분도 식물의 잎을 치고 라인을 살리는 형태로 바뀌고 있어요. 매장에는 판매할 수 있는 식물만 두려고 해요. 재고가 많으면 정글이 될지도 모르니까.
손님으로 만나는 경산사람들은 어떤가요?
꽃집이니까 좋은 마음으로 오는 분들이 더 많은 것 같아요. 깎아달라는 분도 있지만 컴플레인 거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가끔 하나가 시들었네 하시면 사과하고 다음엔 좀 더 예쁘게 만들어드리겠다 해요. 공산품을 팔면 부담이 없는데 꽃다발은 내가 만족해야 손님도 만족하는 것 같아요. 정성껏 잘 만들어드리면 손님도 너무 예쁘다 하면서 또 오시거든요. 결혼 1주년, 2주년, 3주년 계속 주문하시는 손님도 계세요. 고맙고 참 대단하시다 싶어요. 오래된 단골도 많은데 소개도 많이 해주시고 진짜 보람 있어요. 요즘 젊은 분들은 인스타 디엠으로 예약을 많이 하는데 어떤 스타일로 해달라 주문하세요. 완전 신식이죠. 나이 있는 분들은 지나다가 들어와서 화분 사가시거나 한 달, 일주일 전에 예약하시고. 50만 원, 100만 원짜리 용돈 다발도 많이 하세요. 급하게 찾으시는 분들을 위해 미리 만들어놓기도 합니다.
카페와 겸하다가 플라워이음으로 분리된 이유가 있나요?
강변에 플라워카페를 할 때 1층이 꽃집이었는데 손님이 들어오면 2층으로 그냥 올라가 버리는 거예요. 그 전에 꽃집이 잘 되고 있어서 카페를 좀 키우자 한 건데 꽃집이 죽어버렸어요. 꽃이 있으면 꽃집인 줄 알겠지 했는데 잘못 생각한 거죠. 거기서 2, 3년 있는 동안 너무 상황이 안 좋아져서 한 달 전에 서상동으로 옮긴 거예요. 지금은 사람들이 여기 꽃집이 생겼네 하고 알아가는 단계고, 꽃집은 시즌을 타니까 계속하면 될 거라고 믿어요. 졸업 시즌, 인사이동 시즌, 어버이날 이런 시즌이 있으니까 열심히 해서 살려야죠. 저는 여기서 계속 일하면서 이음을 활성화할 거예요.
12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달라졌나요?
개인적으로 많이 달라지고 많이 성장했어요. 어디 가서 잘한다고 하지는 못하지만 혼자 배워서 부끄럽지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니까. 여기는 실습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고 현장에서 배우는 거죠. 스스로 10점을 주고 싶지만, 아직 부족하고 실망할 때도 있어요. 10년 있었으면서 이것밖에 안 되나. 그러다가도 지금까지 버텨온 것도 대단하다 싶기도 해요.
아이들에게는 어떤 말씀을 해주고 싶은가요?
진짜 행복한 사람이 되길 바라요. 건강하면 됐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아빠는 저한테 다 맡기는데 저는 애들 학원도 안 보내요. 학교 갔다 와서 또 학원 가는 게 너무 안쓰럽고 그냥 놀라고 해요. 그래도 학원 다니는 애들 만큼 하니까. 대신 어릴 때부터 책을 진짜 많이 읽어줬어요. 맨날 도서관 가고 서점 가고 학교 도서관 선생님이 우리한테 VVIP라고 해요. 잘 먹고 잘 자고 책 읽고 그것만 해도 좋아요. 한국 엄마들은 보고 듣는 이야기가 많아서 어렵겠지만 저는 그런 말 들을 일이 없으니까. 큰애가 중3인데 농업마이스터고 가겠대요. 공부도 잘하면서 그러니까 선생님도 말리고 저도 반대하다가 지금은 그래 인생 긴데 가보고 아니면 돌아와서 다시 시작해도 된다. 2, 3년 버려도 되잖아요. 엄마 고집대로 해서 잘 안 되면 더 힘들 것 같아요. 둘째는 뭐 아무 생각 없어요. 하하.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플라워이음을 경산에 널리 알리고 싶어요. 여기서 일한 지 10년 됐지만, 경력은 3, 4년 정도라고 생각해요. 처음엔 꽃집을 지키는 정도였거든요. 지금은 제 꽃집이라고 생각해요. 살려야 된다. 영업이나 마케팅은 사무국장님이 있으니까 저는 트렌드에 맞게 꽃을 만들고 더 친절하게 손님을 대해야죠. 인스타 열심히 하고. 사회적기업이고 법인이라 4대 보험도 되고 적지만 월급은 나오잖아요. 더 많이 받으면 좋겠지만 사정이 눈에 다 보이는데 뭘 바라겠어요. 서상동에서 성공했으면 좋겠어요. 숍에서 꽃을 만들고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쳐다봐요. 통유리라 안이 환히 보이거든요. 제가 이음의 간판인 거죠. 회사가 정말 잘 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만들고 싶어요.
박선영
온마을TV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