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빛문화재연구원-경산신문 MOU 지역연구자료공유 기획연재 (2)
기원 3세기 무렵에 쓰인 중국의 역사책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고구려가 자리하고 있고 남반부에는 마한, 진한, 변한으로 부르는 삼한이 존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중 진한은 지금의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동쪽 부분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12개의 작은 나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이 나라들 가운데 경산 지역에 존재했던 나라가 있을 것을 것으로 짐작되나 아직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쓰인 우리의 역사책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파사이사금 23년(102) 가을 실직국과 압독국 두 나라 왕이 와서 항복했다”고 했고, 같은 책 지리지에는 “지미왕대 압량소국을 쳐서 빼앗아 군을 설치했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들의 압독국 또는 압량소국은 경산지역에 존재했던 작은 나라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현재의 임당 유적과 가까이에 압량이라는 지명이 있고, 이 압량에는 후대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이 압량주 군주로 파견되어 백제의 침입을 저지한 사건과 연결되는 압량유적이 존재하고 있다.
임당유적의 발굴은 이렇게 몇 줄의 고대 기록으로 알 수 있는 압독국에 대해서 그 존재를 분명하게 확인해 주었다. 이 유적에는 우리가 원삼국시대 또는 삼한시대라고 부르는 기록의 압독국이 존재했던 시기인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신라가 성립되는 기원후 4세기 무렵까지의 유적과 유물이 아주 풍성하다.
유적에서는 기원전 2세기부터 지배자를 상징하는 세형동검을 비롯한 청동거울 등의 청동기를 많이 부장한 세력가의 무덤인 목관묘, 많은 철제무기를 부장해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는 기원 150년 무렵부터 축조된 대형의 목곽묘도 각각 많이 발굴되었다.
또 인접한 압량면의 신대·부적지구에서도 세력가를 상징하는 많은 목관묘가 발굴되기도 했으며, 압독국을 구성했던 한 집단으로 보이는 세력가의 무덤이 하양읍 양지리에서 발굴되기도 했다. 이들 무덤의 존재로 보아 압독국의 중심은 바로 임당유적이었으며 당시 영남지방의 다른 작은 나라들에 비해 비교적 우세한 집단으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압독국은 기원 3세기를 지나면서 동등한 세력의 집단이었던 경주의 사로국에 영향을 받는 나라로 존재하게 되었다. 비록 완전하게 종속되지는 않았으나 경주 사로국과는 문화적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에는 전부터 이어지던 목곽묘가 경주식이라고 할 수 있는 주곽과 부곽을 칸막이한 신라식목곽묘의 유형으로 나타나고, 여기에서는 경주에서 보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비취곡옥 등이 출토된다.
그 대표적인 무덤이 조영1A-19호 목곽묘인데 여기에서는 2인을 순장한 흔적도 분명하게 확인되고 있다. 또 이때에 임당유적에는 임당토성이 축조되어 지배자의 거주처로 확정되는데, 이는 신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역이 분리되고 토성 내부와 그 주변은 지배자의 독점적 영역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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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1. 신라식목곽묘 (조영1A-1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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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4세기를 지나면서 경주의 사로국은 주변 지역을 정복하거나 복속시켜 고대국가 신라로 출발한다. 이를 가장 잘 알려주는 유적이 임당유적이다. 이 유적에는 4세기 후반 무렵부터 경주의 무덤을 모방한 높고 큰 봉토를 가진 적석목곽묘가 출현한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임당 특유의 암반을 파고 그 안에 목곽을 설치한 다음 돌을 돌린 적석목곽묘의 변형이라 할 수 있는 암광목곽묘를 창출하여 주된 묘제로 삼는다. 이 임당유적의 고총(임당동고분군·조영동고분군·부적리고분군)에서는 신라 왕족이 착용하여 위세를 과시하던 금관 등의 위세품보다 한 등급 아래의 것들이 주로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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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2. 적석목곽묘 (임당G5,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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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신라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황남대총을 위시한 경주의 대형 적석목곽분에서는 몸을 치장하는 위세품으로 금관, 금관식과 관모, 금귀걸이, 금목걸이, 금허리띠, 금반지, 금장식 큰칼 등이 출토되나 임당유적의 고총에서는 금동관, 금동제 또는 은제관식, 유리목걸이, 은제 또는 금동제허리띠, 금제 또는 은제반지, 금동으로 장식한 큰칼 등이 출토되어 대비된다.
이렇게 재질면에서 한 등급 아래의 치레걸이는 그 모양이나 세트에서는 아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런 위세품은 경주에서 제작되어 이곳으로 분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출생, 결혼, 등극, 회갑 등에 경주의 왕이 하사한 것이 고분 속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간접지배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경산지역에 대한 자치권이 압독국의 세력집단에게 있으면서 그 권력이 승계되고 있었으나 외교나 국방 등의 주요 권력은 신라왕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 압독국은 신라의 지방소국으로 존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압독국이 본격적으로 신라의 지방으로 편입되어 소멸한 것은 신라가 임금을 마립간으로 부르던 시대에서 변해 왕으로 부르기 시작하는 법흥왕대 무렵으로 보인다. 이 시기부터는 임당유적에 대형의 고총이 축조되지 않는다. 압독국의 세력가들은 대부분 경주로 들어가 살게 되고, 이곳은 경주에서 파견된 지방관에 의해 다스려지는 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전자는 이곳 출신의 성인 원효의 가족이 경주로 들어갔음에서 읽을 수 있고, 후자는 후에 김유신과 김인문 등 신라의 핵심 인물이 경산지역에 지방관으로 파견된 것이 대변한다.
이상의 결과와 현재 경산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고분군의 분포 상태, 그리고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타는 경덕왕대의 기록인 이곳에 설치했던 장산군 관련 기사를 고려하면 압독국이 존재했던 시기에는 임당유적을 위시한 주변이 당시 서울과 같은 국읍이었고, 자인의 북사리고분군과 진량의 신상리고분군으로 보아 이들을 중심으로 한 지역들이 지방인 읍락의 구실을 하고 있었음과 압독국의 영역이 지금 대구로 편입된 금호강 북쪽의 안심과 수성구 고산지구를 포함한 넓은 영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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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3. 경주(좌)와 임당(우)의 대표적 치레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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