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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양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어린음악대’노래비 |
| ⓒ 경산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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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를 우리는 흔히들 근대 동요의 태동기라 부른다. 1921년 방정환의 어린이 사랑운동을 시작으로 ‘색동회’가 곧 결성되고 우리 동요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우리 근대 동요의 시작을 알리는 작곡가는 박태준과 윤극영이다. 1920년부터 대구에서 동요를 작곡하기 시작한 박태준은 1925년 ‘오빠생각’을 발표하며, 윤극영은 1924년 ‘반달’을 발표했다. 1927년 경성방송국이 개국되면서 우리 동요가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어린음악대 (작사, 작곡 김성도)
따따따 따따따 주먹손으로
따따따 따따따 나팔 붑니다.
우리들은 어린 음악대
동네 안에 제일가지요.
쿵작작 쿵작작 둥근 차돌로
쿵작작 쿵작작 북을 칩니다.
구경꾼은 모여드는데
어른들은 하나 없지요.]
1930년대를 우리 동요의 황금시대라 부른다. 또한 30년대는 최초의 유치원이 생겨 유아동요의 시초를 이룬다. 32년에는 윤석중의 첫 동요집 ‘윤석중 동요집’이 출간되고 많은 어린이 잡지가 등장하면서 많은 아동 문학인들의 고운 동요작품이 이들 잡지에 실리게 된다. 또 하나 주목할 사실은 기독교 주일학교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점인데, 어린이 성가대를 통해 어린이 찬송가 이외에 우리 동요를 배울 수 있어 동요 보급에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 시기에 등장한 동요 작곡가를 살펴보면, ‘꽃동산’의 이흥렬, ‘가을’의 현제명, ‘방울새’의 김성태, ‘산바람 강바람’의 박태현, ‘자전거’의 김대현, 그리고 경산 출신의 ‘어린음악대’의 김성도 등을 들 수 있다.
30년대 대표적인 동요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인 김성도는 1914년 5월 29일 경산시 와촌면 덕촌리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창현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1987년 6월 13일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호는 어진길.
하양보통학교 계성학교,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했다. 어릴 적부터 문재가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소질이 남달랐다. 계성학교 3학년 때인 1929년 16세의 나이에 당시의 대표적인 소년잡지인 ‘소년’을 비롯해 ‘별나라’ ‘새벗’ ‘아이생활’ 등에 동요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성인잡지인 ‘동광’의 문예작품공모에 시가 3석으로 입상하기도 했다. 또 이때 ‘꼬꼬닭아 우지마라’는 노래가사를 써 같은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김성태에 의해 작곡돼 널리 불리고 있었다. 이에 힘입어 김성도는 본격적으로 동요 작사와 작곡에 나서게 됐다. 20살이 되던 1933년에는 ‘강아지래요’가 입선해 문단에 데뷔했다.
1934년에는 대표작인 ‘어린음악대’를 직접 작사하고 작곡했다. ‘어린 음악대’는 메시지가 주는 희망성과 함께 동요문학의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연희전문 졸업 후 황해도 신천의 경신학교, 함흥의 영생중학(1941) 등 민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다. 식민지 강압정책이 극에 달했던 이때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일에 뜻을 두고 아동문학의 길을 걷고자 했던 김성도는 식민지 조국의 현실에 절망, 강소천, 김영일 등과 교류하며 창작에는 거의 절필하다시피 했다. 1945년 해방 후 대구로 돌아와 신명여고를 거쳐 계성고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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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전의 김성도 선생. |
| ⓒ 경산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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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창작 방향을 동화 쪽으로 바꿔 안데르센 동화집을 번역했으며, 1965년에는 첫 동화집 ‘색동’을 필두로 10여권의 동화집을 출간했다. 1975년 이응창, 김진태와 함께 대구아동문학회를 창립하면서 문단활동 무대를 전국으로 넓혀갔다. 계성학교에서 정년으로 퇴직했으며, 계명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 출강하기도 했다.
대표작으로는 자신이 작사한 ‘어린음악대’(1934)가 있고, 동화 ‘밖에서 듣는 음악회’(1963), ‘생각하는 시계’(1970), ‘꽃주머니 복주머니’(1971), ‘숲의 나라 멧새의 나라’(1972), ‘대포와 꽃씨’(1980) 등이 있다. 윤태웅의 ‘아기별’, 김영일의 ‘권투선수 오뚜기’(이상 1936), 김영일의 ‘산골동네’(1939), 강소천의 ‘호박꽃 초롱’, ‘보슬비의 속삭임’(이상 1942) 등에 곡을 붙여 주옥같은 작품을 탄생시켰으며 동요 이외에도 동화를 많이 썼다.
‘안데르센 전집’(1959), ‘그림동화집’(1960) 등 서구 동화를 번역하기도 했으며 ‘꾀 많은 종’,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 ‘파란 병 빨간 병’ 등 전래동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다듬어 쓰기도 했다. 동화집으로는 색동을 비롯해 ‘복조리’(1968), ‘별똥’(1971) 등이 있으며, 동화선집으로 ‘꽃씨와 인형’(1974), 유년동화집 ‘이야기주머니’(1976), ‘하나 둘 셋’(1978) 등이 있다.
문단 활동으로는 문협 경북지부장(1965), 예총 경북지부장((1965), 한국아동문학가협회 부회장(1971), 한국현대아동문학가협회장(1979) 등 한국 아동문학계의 주요단체를 모두 이끌었다. 이러한 공로로 소천문학상(1971), 경북문학상(1975), 대한민국아동문학상(1980), 한국아동음악상(1980) 등을 수상했으며, 1987년에는 경산문인협회가 주관, 전국 문인의 성금을 모아 모교인 하양초등학교 교정에 ‘어린음악대’ 노래비를 건립했다.
신재기 경일대 교수는 “믿기 어렵겠지만 김성도는 하양 와촌에서 대구 계성중학교까지 60리 길을 걸어서 통학했다고 한다”며 “김성도가 택한 아동문학가의 길은 이 통학 길처럼 무척 힘들었을 것이지만 좌절하지 않고 한 길을 꿋꿋하게 걸었다”고 평했다.
【 참고자료 】
풀잎 동요마을, 2005
경산신아리랑, 2010, 신재기
경산시지, 1992, 경산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