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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그날의 죽음을 씻어내지 못하고

최승호 기자 입력 2026.10.23 11:47 수정 2026.10.23 11:47

경산 코발트광산 민간인 학살 갱 안에서

 
↑↑ △ 박시윤
답사기행에세이 작가
박시윤은 2011년 목포문학상으로 등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차세대예술인력육성사업과 아르코문학창작기금에 선정, 문학나눔도서보급사업 좋은책 선정위원을 비롯해 러 문학공모전 심의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 『우리가 몰랐던 울릉도, 1882년 여름』, 『역사와 삶의 땅, 달성』, 『경주는 흐른다』가 있다.
경주와 울릉도·독도를 비롯해 만주·간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중국 상하이 등 항일독립운동의 현장을 답사하며 역사와 문화유산,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 △ 박시윤(왼쪽에서 2번째) 작가와 순례객들이 수평2굴 발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지난 4일과 6일, 두 차례 경산 코발트광산을 찾았다. 경산신문 최승호 대표의 안내에 따라 백자산 가파른 기슭을 올랐다. 그다지 심하지 않은 경사에도 발이 자꾸 미끄러지고, 풀이 발목에 걸려 위태로웠다. 숨이 턱 막힐 즈음 두 개의 수직굴이 있는 곳에 닿았다.산허리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도시에서 바라본 백자산은 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푸르렀다. 그러나 그 무성한 푸름 아래, 아직 수습되지 못한 죽음과 국가가 은닉한 시간이 겹겹이 매장되어 있었다. 산의 고요가 거대한 침묵처럼 느껴지는 순간, 서늘한 소름이 등줄기를 긁고 흘렀다.
최승호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수직굴 입구에서 수평갱이 맞닿는 지점까지의 깊이는 약 49미터라고 한다. 아파트 16층 높이에 이른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발밑의 어둠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이것은 버려진 폐광의 흔적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몸을 한꺼번에 집어삼키고도 끝내 입을 다물지 못하는 거대한 무덤이었다. 관도 묘비도 없이 이름마저 빼앗긴 죽음들이 겹겹이 매장되고 은닉된 국가폭력의 아가리였다.

1930년대 무렵 경산에는 30여 개의 광산이 있었다. 백자산 기슭의 이 코발트 광산은 1937년 조선인 박춘길이 운영하던 금·은 광산이었다. 그의 이름을 따 ‘춘길광산’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인 1941년, 일본은 박춘길에게서 광업권을 넘겨받아 광산의 이름을 ‘보국광산’으로 바꾸었다. 그해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쟁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코발트를 얻기 위해 백자산의 속살을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코발트는 철과 섞이면 단단하고 열에 강한 합금이 된다. 포신과 총열, 항공기 부품을 만드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략 광물이었다.
 
‘보국광산’이라는 이름에는 식민지 조선의 땅을 파헤쳐 얻은 광물을 일본의 침략전쟁에 바친다는 제국의 논리가 스며 있었다. 조선인들은 나라를 빼앗은 제국의 무기를 만들기 위해 어두운 갱으로 동원되었다.
 
갱에서 캐낸 원광석은 산 너머 선광장으로 옮겨졌다. 큰 돌을 잘게 부수고 갈아 코발트 성분이 많은 광석만 가려낸 뒤, 불순물을 걷어내고 제련했다. 그렇게 얻은 코발트는 경산역에서 화물열차에 실려 부산으로 내려갔다. 다시 바다를 건너 일본 시모노세키 일대의 군수공장으로 흘러들어 무기가 되었다.
광산이 번성하던 시절, 산 아래에는 300여 호가 모여 사는 광산촌이 들어섰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떠나자, 광산은 하루아침에 버려졌다. 사람들은 일터를 잃었고, 백자산의 몸속에는 거미줄처럼 얽힌 수평갱과 수직갱만이 깊은 상처처럼 남았다.

고향으로 돌아가도 달리 먹고살 길이 없던 노동자들은 광산을 떠나지 못했다. 돈이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찾아야 했다. 한때 광석을 실어 나르던 레일과 갱 안의 쇠붙이를 뜯어 내다 팔았다. 제국의 전쟁이 멈춘 뒤에도 그들은 버려진 광산의 잔해에 기대어 겨우 목숨을 이어갔다.

광산은 몇 해 동안 주인을 잃은 채 백자산의 어둠 속에 방치되었다. 누구도 버려진 갱이 사람을 죽이고 감추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1950년 여름, 폐광은 국가의 처형장으로 돌변했다. 이 극악무도한 처형의 뿌리는 해방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좌우의 대립은 체포와 고문, 테러와 살육으로 번졌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대구의 민심은 벼랑 끝에 서 있었다. 미군정은 일제 경찰을 등용하는 한편, 미곡 수집정책으로 쌀을 강제로 거두었다. 여기에 콜레라와 홍수까지 덮쳤다. 방역을 명분으로 길이 막히고 배급 식량마저 공급되지 못했다.
19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노동자의 파업을 시작으로 총파업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대구에서도 철도와 우편, 섬유와 출판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왔다. “쌀을 달라.” 대구 시민들의 살기 위한 요구가 시작되었다. 10월 1일, 경찰은 대구역 일대의 시위대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대구 철도노조원 김용태가 사망했다. 이튿날 시민과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항쟁은 대구를 넘어 경북과 남한 전역으로 번졌다.

1947년 제주에서 일어난 3·1절 발포사건과 이후의 탄압은 제주4·3사건으로 이어졌다.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군과 경찰은 ‘토벌’이라는 이름으로 제주 도민들을 극도로 몰아붙였다. 같은 해 10월부터는 중산간 마을을 불태우는 초토화 작전이 본격화되었다. 노인도, 여자도, 어린아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죽은 까닭조차 묻지 못한 주검이 검은 돌밭 위에 마구 흩어졌다.

1948년 10월 19일에는 제주 파병을 거부한 군인들의 봉기로 여순사건이 일어났다. 반란군을 진압한다는 명목 아래 여수와 순천을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 주민들이 ‘부역자’와 ‘협조자’로 지목되었다. “저 사람이 좌익이다”라고 지목하는 순간 체포와 구타, 즉결 처형이 서슴없이 뒤따랐다. 법정도 판사도 변호인도 필요 없이, 의심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시대였다.

제주4·3과 여순사건을 거치며 국가는 사람을 국민과 적으로 가르는 일에 익숙해졌다. 혐의는 곧 죄가 되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와 과거의 행적, 가까이 지낸 사람과 사는 곳만으로도 생사가 갈렸다. ‘빨갱이’라는 낙인은 한 인간을 법의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한번 낙인이 찍히면 고문도, 총살도, 시신을 내다 버리는 일도 정당화는 시대였다.

1949년 결성된 국민보도연맹은 좌익 활동 전력이 있는 사람을 전향시키고 관리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가입 인원을 채우기 위한 강제 할당이 이루어졌다. 쌀이나 보리, 비료, 고무신을 준다는 말만 믿고 이름을 올린 농민도, 마을 책임자가 대신 서류에 이름을 올린 일도 허다했다. 자신이 왜 보도연맹원이 되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명단은 처형할 사람을 가려내는 살생부로 돌변했다. 경찰과 군 정보기관은 보도연맹원과 요시찰 대상자를 소집하거나 예비검속 했다. 이들은 경찰서 유치장과 창고, 형무소에 불법으로 갇혔다. 일부 지역에서는 A·B·C·D 또는 갑·을·병으로 등급을 나누었으나 기준은 자의적이었고, 지역마다 등급의 의미와 처리 방식도 달랐다. 누군가는 돈과 연줄로 풀려났다는 증언도 있을 만큼 결국 사람의 목숨은 법과 재판이 아니라 담당자의 자의와 연고, 뇌물에 따라 갈렸다.

전선이 남하하자 국가는 이들이 인민군에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집단처형을 명령했다. 아직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을, 앞으로 죄를 지을지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재판(?), 증거(?), 변론(?), 판결(?) 아무것도 작용되지 못했다.
 
경산 코발트광산으로 끌려온 이들 가운데에는 경산과 청도, 영동 등지의 국민보도연맹원과 요시찰 대상자, 대구형무소 재소자들이 있었다. 제주4·3과 여순사건에 연루된 사람도,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도, 가벼운 법 위반으로 수감된 사람도 섞여 있었다. 국가는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을 ‘좌익 혐의자’라는 한마디로 묶어 이름과 생애를 지우고, 처형해야 할 숫자로 바꾸었다.

1950년 7월 중·하순부터 8월 중순 무렵까지 군용트럭이 백자산으로 쉼없이 올랐다. 트럭이 들어오는 날이면 군경은 마을 주민들을 인근 학교로 소개하거나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총을 쏘아 접근을 막았다는 증언도 전해진다.

덮개를 친 트럭 한 대당 서른 명에서 마흔 명가량이 실렸다고 한다. 하루에 많게는 여덟 대 이상의 차량이 오르기도 했다. 트럭 짐칸에 짐짝처럼 실려 온 사람들은 여러 명씩 포승줄에 묶여 있었다. 군경은 이들을 수직굴 앞으로 끌고 가 여덟 명 또는 열 명씩 한 줄로 세웠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탕, 총성이 터지면 사람들은 앞으로 꼬꾸라져 갱 안으로 떨어졌다. 총탄에 맞은 사람과 함께 맞지 않은 사람도 포승줄에 함께 묶인 채 수직굴 아래로 떨어졌다. 먼저 떨어진 사람 위로 다음 사람이 쏟아졌다. 총에 맞아 죽은 사람도, 추락하면서 뼈가 부러진 사람도 있었다.
검은 굴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삼켰다.
학살이 거듭되면서 수직굴은 시신으로 차올랐다. 한여름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했다. 살이 썩고 몸이 부풀었다. 죽은 사람들의 피와 체액이 갱도 안의 물과 뒤섞였다. 며칠 뒤 부패한 시신이 아래로 가라앉으면 군경은 다시 사람을 끌고 와 총을 쏘았다. 수직굴을 더는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인근 대원골 골짜기에 구덩이를 파고 집단사살과 암매장을 계속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경산 코발트광산 일대에서 희생된 사람이 1,800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유족회와 시민사회에서는 3,500명 이상으로 보고 있다. 정확한 숫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숫자가 다르다는 것은 학살의 규모가 불분명하다는 뜻만은 아니다. 국가가 사람을 죽이고도 이름과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살해한 사람의 수조차 헤아릴 수 없도록 은닉하고 은폐했다는 의미다.
가해 주체로는 경산·청도지역 경찰과 경북지구 CIC 파견대, 국군 제22헌병대 등이 확인되었다. 이들은 비무장 민간인을 체포하고, 감금하고, 분류하고, 호송하고, 사살했다. 이 모든 과정은 우발적인 살인이 아니었다. 여러 국가기관이 인력과 차량, 무기와 처형 장소를 동원해 벌인 조직적인 국가범죄였다.
현장에서는 유해와 함께 소련제 불발탄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희생자들의 시신을 갱 안으로 밀어 넣은 뒤 입구를 폭파하고, 인민군의 공격으로 보이게 하려 했던 것이 아니냐는 가설이 생긴다.

두 개의 수직굴을 돌아보고 산 아래로 내려와 수평갱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이 낮았다. 물은 소리를 죽인 채 발밑을 흘렀다. 맑고 깨끗했다. 너무 맑아서 오히려 참혹했다. 불빛이 흔들릴 때마다 굴곡진 암벽의 명암도 따라 흔들렸다.
입구를 넘자 계절이 뚝 끊겼다. 햇살의 온기는 몇 걸음도 따라 들어오지 못했다. 갱 안은 무서우리만치 서늘했다. 죽음 위에 죽음이 켜켜이 쌓인 1950년의 서늘한 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듯했다.
서늘한 냉기가 옷 속으로 스며들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두드렸다. 발밑으로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물은 오래전부터 이 어둠을 지나왔을 것이다. 포승줄에 묶인 사람들의 신음도, 군홧발 소리도, 연달아 터진 총성도 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총탄이 머리를 관통하고, 가슴이 뚫린 채 수직굴 아래로 떨어진 사람들의 마지막 숨도 지나왔을 것이다. 죽음이 산재한 자리를 차갑게 더듬으며, 쉬지 않고 흘렀을 것이다.
이토록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곳에 정말 그 많은 죽음이 묻혔단 말인가. 믿기지 않았다. 물은 죽은 자의 피와 썩은 살과 머리카락, 벗겨진 옷자락과 주인을 잃은 신발을 훑고 흘렀을 것이다. 그러나 물은 누군가의 죄까지 씻어내지는 못했다. 자연은 인간의 살육을 대신 용서할 수 없으니까.
남은 유족들은 가족의 죽음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코발트광산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입 밖에 내는 순간 자신도 ‘빨갱이 가족’으로 몰릴 수 있었다. 남편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 묻는 일조차 위험했다.
취업과 진학, 군 복무와 사회생활에서 불이익을 주는 연좌제의 사슬이 자식 세대까지 따라다녔다. 시신은 갱에 가두고, 기억은 공포 속에 감금했다. 학살의 총성보다 더 오래 지속된 것은 강요된 침묵이었다.
4·19혁명 뒤 유족들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5·16군사쿠데타 이후 유족회 관계자들이 다시 체포되고 고문당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명예를 회복하자고 나선 유족이 오히려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몰렸다. 죽은 이를 애도하는 일마저 범죄가 되었다. 국가는 학살을 은폐하기 위해 유족까지 혹독하게 처벌했다.
경산 코발트광산에는 일제의 수탈과 미완의 친일 청산, 제주4·3과 여순사건을 지나 굳어진 반공체제, 전쟁을 구실로 국민을 불법 처형한 국가폭력의 역사가 겹쳐 있다. 그곳의 어둠은 오래 쌓인 혐오와 공포, 낙인과 침묵이 함께 파놓은 구덩이였다.
갱도 중간쯤에서 발굴된 유해를 마주했다. 가지런히 바구니에 담겨 있던 유해, 흙과 돌 사이에 보이던 뼛조각 앞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갱에는 미처 수습하지 못한 유해가 여전히 남아 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의 발굴로 420여 구가 확인되었고, 2023년부터 이어진 추가 발굴에서도 수천 점의 유해가 수습되었다. 그러나 이름을 되찾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사람은 많지 않다.
유족들은 해마다 음력 9월 9일 이곳에서 위령제를 지낸다. 이름조차 되찾지 못한 넋들에게 술을 올리고 깊이 머리를 숙인다. 국가는 은닉하고 은폐했으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차마 잊을 수 없었다.
보상과 위령제만으로 국가의 책임이 끝나는 것일까. 아니다. 남은 유해를 발굴하고 신원을 확인해야 한다. 누가 명령하고 누가 집행했는지도 밝혀야 한다. 그리고 사람을 죽인 국가가 죽은 이들과 유족 앞에 국가의 이름으로 사죄해야 한다.
박만순의 『기억전쟁』과 『박만순의 기억전쟁 2』에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을 추적한 기록과 경산 코발트광산 희생자, 유족, 생존자의 증언이 담겨 있다고 한다. 우리가 이 기록을 읽어야 하는 까닭은 참혹한 죽음을 관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국가가 지워버린 사람들의 이름과 생애를 다시 인간의 자리로 돌려놓기 위해서다.

최승호 대표는 죽은 사람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캐임브리대 권헌익 교수가 말한 ‘영혼의 권리’. 빼앗긴 이름을 되찾을 권리. 어디에서 어떻게 살해되었는지 밝혀질 권리. 모욕과 누명을 벗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권리. 무엇보다 그들이 마지막까지 꿈꾸었을 세상을 살아 있는 사람들이 끝내 만들어줄 의무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오래 생각했다.
죽은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그래서 죽은 사람의 권리를 되찾아 주는 일은 살아 있는 사람의 의무가 된다. 뼈 한 조각이라도 찾아 이름을 불러주는 일. 감추어진 살육을 기록하는 일. 국가가 저지른 범죄를 국가의 이름으로 인정하고 사죄하게 하는 일. 다시는 사상과 낙인만으로 사람을 잡아 가두고 죽이지 못하도록 막는 일.
그것이 살아남은 우리가 대신 지켜야 할 죽은 자의 권리일 것이다.
갱 밖으로 나왔을 때 빛이 한동안 눈부셨다. 조금 전까지 머물렀던 갱 안의 어둠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산 아래로 내려오니 도시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자동차가 지나가고, 사람들이 웃으며 일상을 건너갔다.
수직굴 쪽을 돌아보았다. 뉘엿뉘엿 저무는 시각, 묽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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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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