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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를 아시나요?

경산신문 기자 입력 2026.10.08 14:26 수정 2026.10.08 14:26

 
↑↑ 최성규
마을중심공간보물섬 대표
작가
브뤼노 라투르(1947~2022)는 프랑스의 인류학자·사회학자·철학자이자 과학기술학 연구자로, 미셸 칼롱, 존 로와 함께 행위자-연결망 이론(ANT)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스스로 비 근대주의를 내세우며 과학기술학에 기반한 독특한 사유를 펼친 사상가로, 화이트헤드·타르드·들뢰즈·세르·이자벨 스텡거스 등 현대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혁신사회학센터와 Science Po 교수, 현재는 파리 정치대 명예교수이자 HfG·ZKM 소속으로 활동했다. 그는 학문적으로도 한 분야에 머물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평생 붙잡았던 질문은 생각보다 소박하지만, 답을 향해 가는 그의 길은 늘 불편해 보였다. 라투르는 우리가 흔히 과학을 이해하던 방식을 거꾸로 비춘다. 과학을 ‘완성된 지식’으로만 볼 때 생기는 오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라투르는 문장 사이사이로 계속 되묻는다.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로 대표되는 문제의식은 결국 한 가지 결론에 수렴한다. “사실은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혼자 탄생하지 않고, 여러 장치와 사람과 제도가 얽힌 과정 끝에 만들어진다”라는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진리이다.
 
라투르가 말한 ‘연결’은 거창한 곳에서만 만들어질까? 나는 자인에서 살고, 아침이면 버스를 타고 경산으로 출근한다. 오목천의 작은 물새들은 아침마다 물 위에서 자신들의 시간을 짧게 접었다 펴는 듯하다. 누가 그들을 “살아있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어떤 문장과 규칙, 그리고 관리의 언어로 이어지곤 한다. 수변 정비는 어디까지를 손대고, 어떤 방식으로 물길을 살필지. 모래톱과 수풀은 어떤 주기로 다듬어야 하는지. 쓰레기나 오염은 어떻게 줄이고, 물의 상태는 어떤 기준으로 확인하는지. 하지만 물새 한 쌍이 남기는 깃털 자국과 발자국 사이에는, 우리가 직접 보지 못하는 많은 연결된 행정의 계획, 점검의 기록, 현장 담당자의 판단, 시민의 습관이 겹쳐 있다. 라투르식으로 말하자면, 오목천의 물새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물과 바람과 먹이와 사람의 관리가 얽혀 있는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왜 여기 있지?”가 아니라, 조금 더 조용히 이렇게 바뀔 수 있다. “무엇이 이곳을 이들에게 닿게 했지?”, “그 연결은 지금도 잘 작동하고 있을까?”
내가 일하는 ‘보물섬’ 곁 남천을 따라 걷다 보면, 같은 날이라도 물빛이 다르게 보인다. 날마다 조금씩 다른 바람과 햇빛이 번지고, 누군가의 산책 습관이 남긴 흔적이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 강변의 풍경은 늘 ‘한결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물길의 안정, 수질의 관리, 하천 정비의 속도, 하천 주변의 시설과 안내문, 주민들의 이동 패턴, 그리고 계절 등 수많은 ‘행위자들’이 겹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장면”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우리는 흔히 날씨, 미세먼지, 교통, 보건 같은 문제를 “이미 정해진 결론”처럼 받아들이곤 한다. 하지만 결론은 그렇게 쉽게 고정되지 않은 것이다. 물은 흐르고, 사람은 움직이며, 기준은 갱신되고, 기록은 수정된다. 그러니 “정답이 무엇인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장면이 어떤 경로로 만들어졌는지를 읽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라투르식으로 “누가 더 옳은가”보다도 “이전에, 무엇이 무엇과 연결되어 우리 앞에 이 장면을 만들었는가”를 물어본다. 비판보다 먼저 관찰이 필요하다.
 
라투르에게 세계는 인간의 의지만으로도, 기술만의 자동 결과만으로도 굴러가지 않는다. 연결의 네트워크가 움직일 때 “무엇이 일어났는지”가 현실이 된다. 우연히 보게 된 브뤼노 라투르의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는 과학을 ‘완성된 지식’으로만 보지 말고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보자는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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