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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구 40년 장인 김주겸 대표

최승호 기자 입력 2026.10.08 10:45 수정 2026.10.08 10:46

 
↑↑ 김주겸 대표.
“회사 다니던 남편이 결혼하자마자 그림만 그리며 살고 싶다는 겁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담임 선생님이 ‘너는 그림을 그리면 되겠다’고 하신 말씀이 가슴에 남았나 봅니다. 그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방법으로 표구를 선택한겁니다.”

‘경미회’ 회장을 역임했던 한국화가 고 박효경 화백이 40여 년 전 시작한 표구 일을 여태 놓지 않고 이어가고 있는 경산표구사 김주겸(사진 68세) 대표를 이주일의 경산사람으로 만났다.
 
공주 출신인 김씨는 의령에서 태어난 박 화백과 구미에서 의류계통 일을 하다가 만났다. 박 화백보다 한 살 적었던 김 대표는 박 화백이 27살 되던 해에 결혼해 경산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남편은 당시 월급이 12만원이었는데 어느 날 표구기술을 배운다고 작은 표구사에 20만원을 주고 왔어요. 당시 경산에 표구사가 6개 있었는데 그 가운데 작은 표구사에서 20일간 배접부터 순서만 가르쳐주고는 가라고 하더래요.”

자기가 그린 그림으로 1, 2년 정도 연습한 후 표구사를 차렸다. 처음에는 시장 부근 서실 2층에서 시작해서 시장 건너편으로 옮겼다가 다시 경산교 부근 경산표구사를 인수 받아 자리를 잡았다.
“표구사를 시작한 지 10년 정도 지났을까 IMF가 닥쳤어요, 다들 죽을 판인데 표구사는 달마 때문에 때 아닌 호황이었어요. 표구사 하면서 그때가 제일 돈을 많이 번 것 같습니다. 달마를 걸어놓으면 돈이 들어온다는 소문 때문에 집집마다 달마 그림을 걸었던 겁니다.”

표구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박 화백은 대구대 평생교육원에서 한국화가인 김원 교수의 사랑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박 화백은 대구미술대전 입선을 시작으로 경북미술대전, 신라미술대전, 대한민국 진경산수대전 등에 잇따라 입선하면서 한국화가로 자리잡았다. 경미회와 창묵회원 등으로 활동하며 화랑과 표구사를 운영하며 지역미술계의 주요인사가 됐다.
 
박 화백이 지역미술계에서 보폭을 넓히면서 표구사는 자연스럽게 김 대표 중심으로 돌아갔다.
표구는 보통 6개 공정으로 완성된다. 먼저 작품이 들어오면 배접을 하고 틀을 짠다. 초배지를 몇 번 바르고, 그 위에 창호지를 바른 후 작품을 올린다. 다시 비단을 바르고 유리를 올리면 모든 공정이 끝난다. 40호는 1주일 정도 소요된다. 이 가운데 목공소에서 2-3일을 잡아 먹는다.

“틀을 짜는 목공 일을 직접 하면 돈이 되는데 전문성이 부족하니까 그 시간에 표구를 더 하자고 마음먹었죠. 목공 일은 경산에는 없어 대구 나가서 하는데 대구도 이제 두 곳만 남았습니다.”
 
1, 2호 소품에서 150호 대작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작품을 한 김 대표에게도 잊혀지지 않은 작품이 있다. 목공비만 200만원이 들어간 ‘천마도’는 지금 경북도지사실에 걸려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김병호 선생도 잊지못할 손님이다. 백천동에 사셨던 김 선생은 본인 글씨로 병풍을 20개 이상 해서 일가친지들에게 선물했다.
 
경산표구사를 이야기할 때 이분을 빼놓을 수는 없다.
“장산서예원이 역전에 있을 땐데 남편이 작품 두 점을 들고 납품하러 갔는데 장산 선생임이 흡족해 하시더라는 겁니다. 반절 두 작품에 2만원 받아서 경산교를 건너오면서 어찌나 돈은 꼭 쥐고 왔던지 돈이 다 젖어 있었습니다. ‘이제 됐다’는 생각에 어떻게 다리를 건너왔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고 했습니다”

경산표구사는 이번 가을에 자인으로 이사할 계획이다. 작은 아들이 떡집을 하고 싶다고 해서 기존의 두텁떡 전문집을 인수했는데 표구사도 그리로 옮길 생각이다.
“지난 추석 때 표구사를 정리하면서 울컥했습니다. 먼저 간 남편과 제 분신과도 같은 작품들이 차마버리고 갈 수가 없어서 하나씩 싸고 있습니다”

30년 정든 표구사를 정리하는 만큼 많이 서운할 법도 하다. 무엇보다도 공학박사 아들이 전공을 접고 떡집을 시작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지만 새로운 도전에 힘을 보태주고 싶다.
 
”막상 표구사를 그만둔다고 하니 여러 곳에서 계속해 달라고 하네예. 이달 말쯤 자인으로 옮겨 가면 떡방앗간 옆에 작은 창고가 하나 있는데 거기를 작업실 겸 사랑방으로 개조해서 그동안 도움을 주신 분들께 보답하려고 합니다. 어릴 때는 ‘주겸’이라는 이름 때문에 울기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귀한 구슬이 겸손하기까지 하면 그것이 바로 세상의 보배’라는 말씀을 듣고 제 이름에 자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저도 박 화백에 이어 세상의 보배가 되어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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