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은 영천시 다음으로 전국에서 저수지가 많은 도시다.
영천시가 600여 개로 압도적으로 많고, 다음으로 우리 경산이 300여 개로 많다. 이렇게 경산시에 저수지가 많은 것은 경북도에서 상대적으로 과우지(600~1300㎜)에 해당하는 데다 지형의 대부분이 구릉성 침식 저지로 되어 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무엇보다도 경산은 농경지에 비해 큰 강이 없다. 오목천과 남천이 있지만 암반으로 이루어진 남천은 비가 내리면 하루 만에 물이 마르는 탓에 논농사를 위해서는 물을 가두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오목천이 경산의 곡창지대인 용성과 남산, 자인 압량을 지나고 있지만 수원이 부족해 모내기철에는 늘상 용수 부족에 시달려왔다.
이런 지형적 특성을 극복하기 위해 고대로부터 경산인들은 저수지를 막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저수지 축조와 관련된 기록으로는 조선시대 정응지가 축조했다는 연지가 있다. 정응지는 1568년 경주에서 태어나 참판을 지낸 동래 정씨 정개보의 5세손으로 자는 원도, 호는 농수이다. 정응지는 꿈 속에서 만난 도인이 가르쳐 준 데로 다음 날 아침 들판에 나가 큰 못을 막을 정도의 땅에 하얀 서리가 내려 있어 그곳에 저수지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가까운 시기로는 일제 시대 최종래 와촌면장이 축조한 소월지가 있다. 소월지가 내려다보이는 제당에 서 있던 최종래면장기념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소월지 덕분에 메추리 3마리가 날아와서 2마리가 굶고 돌아간다는 황무지가 옥토로 변하고 메밀꽃이 펄펄지던 황무지가 황금이 파도치는 들판으로 변해 큰 가뭄에도 가물지 않는 부촌이 되었다.’
문천지도 수리조합장이었던 박문기씨의 안목 때문에 넓혀졌다. 문천지는 4년 주기로 한발이 찾아와 새들도 굶고 갈 정도로 황량한 들판 위에 축조돼 하류 지역을 옥토로 만들었다. 가뭄이 들면 하늘을 쳐다볼뿐 속수무책이었던 이 지역에 당시 경산수리조합장이었던 박문기씨는 한국전쟁 직후의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저수지의 필요성을 정부 관계요로에 역설, 거액을 확보해 대역사를 마무리했다고 공적비에 적혀 있다.
이렇게 경산의 저수지들은 저마다 사연을 지니고 있다. 저수지들은 물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축조과정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경산신문은 경산의 역사문화자산으로 저수지에 주목했다. 이미 20년 전에 저수지 탐방을 통해 1. 저수지의 역사-최초 축조자, 탄생과정, 축조에 얽힌 전설 및 설화 등 2. 저수지의 현황-넓이, 저수량, 둘레, 몽리면적, 몽리민, 제당길이 및 높이 3. 저수지의 관리, 수리세 변천 내역, 용도 등 4. 기타 저수지에 얽힌 재미있는 사연 등을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이번에 다시 경산신문은 경산시와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경산의 대표적인 저수지 15개를 선정해 드론 사진과 사진, 그림, 스토리를 엮어 한권의 책으로 만들어냈다.
경산시 관내 저수지는 300여 개로 한국농어촌공사가 26개, 경산시가 290개를 관리하고 있다.다. 지역별로는 용성면이 69개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진량읍이 53개, 남산면이 45개, 와촌면이 30개, 동지역이 29개, 남천면이 23개 순이다.
도농복합도시 경산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저수지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분명 저수지는 대학과 함께 경산의 주요한 역사문화자산이다.
이제라도 경산시는 저수지의 역사문화적 가치 제고를 위한 작업에 나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