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46년 10월, 48년 4월, 60년 3월 그리고 80년 5월 우리는 국가폭력으로부터 부모형제를 잃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할 군경에 의해, 준군사조직과 특정집단에 의해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2005년 5월 노무현 정부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에 의해 진실화해위원회를 설치하고 이들 사건에 대한 유가족들의 진실규명 신청을 받아 진실규명 결정을 해왔다.
60년 전국유족회는 한국전쟁 전후로 민간인 114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는 10월 항쟁에 뒤이은 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은 물론 적대세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 수많은 의문사에 대한 유가족들의 진실규명 신청을 받았고, 오랜 기간 조사와 유해발굴 끝에 코발트광산사건의 경우 2009년 11월 17일 ‘군경에 의한 불법처형’이라고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여기까지 과정은 실로 지난했다. 부모형제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는데도 찾아나서지 못했다. 학살이 일어난 후 10년 만에 결성된 유족회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쳤지만 이듬해 군사쿠데타로 감옥에 들어가고 위령탑은 파괴됐다. 이후 40년간 유가족들은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눈이 있어도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
경산에서는 60년 8월 합동위령제 이후 무려 40년 만에 코발트광산유족회가 결성됐다. 2000년 1월 시민단체와 지역신문을 주축으로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설치되고, 3월에는 유족회가 결성돼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역사평화공원 조성 운동이 가열차게 일어났다.
평산동 폐코발트광산과 인근 대원골에서 처형된 피학살자가 무려 3500명이라는 보도에 공중파방송이 나서 ‘진짜 그렇게 많냐’며 확인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2001년 3월 수평2굴 유해 확인과정에서 40여 구가 수습됐다. 두개골과 대퇴부 등에서 총상과 화염흔이 발견됐다. 명백한 국가폭력이었다.
시민사회와 유가족들은 국가의 진상조사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국제사회에 호소하기로 했다. 2001년 6월 뉴욕에서 코리아국제전범재판을 열고 최종학살책임자로 미국을 지목하고 사과와 함께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국민들의 서명지 5만장을 백악관에 전달했다. 2년 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인권위 소위에 어렵게 참가해 유엔 차원의 진상조사를 요청했지만 남한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리고 마침내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고 1호 법률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국회를 통과됐다.
법에 따라 설치된 진실화해위원회는 유가족들의 진실규명 신청과 발굴을 통해 국가폭력이라고 규정했고, 사법부는 국가에 보상을 명령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설치되고 10년만인 지난2016년 마침내 코발트유족들은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았고 위령탑이 조성됐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유가족들은 함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운동을 진행했던 시민사회를 떨쳐버리려고 하고 있다. 민주단체와 진보적 대학생단체의 순례를 막기 시작했고, 지난 달 2기 진실화해위원장이 현장을 방문하는 날에는 시민단체 소속 유족회 이사들에게는 참석하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요청까지 했다. 뉴라이트계열의 진화위와 보수지역 지자체가 유족들과 시민사회를 갈라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유족들의 변심은 무슨 연유에서 비롯된 것일까.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낸 학자의 지적대로 피해사실이 벼슬이 된 것일까? 코발트광산은 유족회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경산1호 공약인 국립미술관을 코발트광산에 건립하고, 문화예술을 통해 시민들의 반전평화인권의식을 고양시켜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