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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스리랑카식 어우러진 집 짓고 싶어요”

경산신문 기자 입력 2025.03.27 17:53 수정 2025.03.27 17:55

한옥에 반해 유학길…예비 건축가 스리랑카인 루비니 씨
“외국인 자녀 어린이집 이용 지원정책 현행보다 많아지길”
(재)한빛문화유산연구원·경산시가족센터·경산이주노동자센터·온나무·경산신문 공동기획 (18)

↑↑ 스리랑카에서 온 루비니.

“학교에서 건축은 공간을 쓸모 있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배웠어요. 제가 집을 짓는다면 오래 살고 싶은 집을 한국식과 스리랑카식을 합쳐서 만들고 싶어요.”

스리랑카인 루비니(32) 씨는 K-드라마의 배경이 된 한옥의 아름다움에 반해 한국으로 건축 공부를 하러 왔다. 영남대에서 건축디자인을 전공하고 지금은 대학원 진학을 준비 중이다. 코로나를 피해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동갑내기 남편과 결혼했으며, 뒤늦게 합류한 남편과 함께 한국에서 공부와 육아,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있다. 루비니 씨의 고향은 경산시 규모의 지방 도시 캄파하. 그곳에 부모님과 여동생 두 명이 있다.

한국을 선택해서 오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고등학교 졸업 후 엄마가 일하시던 항공사에서 항공 화물을 공부하다 직장을 다니고 있었어요. 원래 건축디자인에 관심이 많았지만, 당시 스리랑카에는 공부할 수 있는 기관이 없었습니다. 유학을 준비하던 중에 우연히 한국 드라마 ‘동희’를 보게 됐는데 한옥에 푹 빠졌죠. 한옥을 보면 너무 설레고 건축을 배우고 싶었어요. 특히 천장도 너무 예뻐서 되게 궁금했어요. 그렇게 2015년 스물두 살 때 한국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스리랑카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오셨나요?
아뇨. 대경대에서 한국어 교육을 먼저 받고 영남대 건축디자인학과에 들어갔어요. 어학원에서 공부하고 드라마 보고 따라 하고 잘 때는 TV 뉴스 틀어놓고 잤어요. 아나운서 발음이 좋으니까. 전공 용어는 어려워서 단어 찾고 의미 풀이하고 다시 스리랑카 말로 번역해서 외우느라 힘들었어요. 한자로 이야기하는 교수님도 많아서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죠.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는 장학금도 받았는데 계획이 없던 상태에서 아기를 낳았고 남편은 한국에 적응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3, 4학년 때는 장학금 받을 정도로 잘하지는 못했어요.

경북 경산으로 유학을 오셨는데 이유가 있을까요?
사실 한국은 서울만 알고 대구나 경북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 그때 당시 스리랑카에서 해외로 유학생을 보내는 에이전시가 따로 있어서 거기를 통해 왔습니다. 경산에 있는 대경대가 한국어를 배우기 편했고 이미 스리랑카 학생들이 유학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선택했죠.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D10 구직 비자로 체류 중인데 일을 찾거나 면접을 볼 때 가장 많이 쓰는 비자입니다. 지금은 자격증 준비하고 9월에 경북대를 목표로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어요. 인터뷰 준비도 해야 하고요. 아기를 낳았을 때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마음도 복잡하고 적응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육아도 좀 편해지고 남편도 있으니까 다시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마음먹고 있습니다.

남편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코로나 때문에 2020년 마지막 학기를 휴학하고 스리랑카에 갔는데 그때 부모님 소개로 만났습니다. 저는 비혼주의자였기 때문에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부모님의 간절한 바람으로 결혼하게 됐죠. 결혼을 안 하면 한국에 못 가게 하겠다고 하셨어요. 지금은 좋아요. 워낙 남편이 착하고 순한 사람이니까. 남편은 스리랑카에서 기획, 디자인, 사진 편집하고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동영상 제작을 전문으로 했어요. 한국에 사는 지금도 원래 일하던 회사와 손잡고 본국에서 제작 의뢰를 받아 일하고 있습니다.

스리랑카와 한국의 결혼문화가 비슷한가요?
옛날에는 결혼하면 여자가 집안일을 다 해야 했고 남자가 밖에서 돈을 벌었어요. 여자는 집안일만 하고 공부라든가 바깥 활동을 못 하게 했습니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요. 제가 비혼주의자가 된 것도 가정에 매이고 싶지 않아서예요. 결혼하면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제가 원하는 걸 못하게 되지 않을까 무서웠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건축사가 되는 게 목표였고 그걸 포기할 수 없었어요. 결혼하고 아기를 낳았는데 남편 도움도 없으면 어떻게 하나 싶었죠. 다행히 남편은 되게 많이 도와주는 편이에요. 덕분에 지금은 마음 편하게 생활하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학업과 육아를 병행하기 어렵지는 않으셨나요?
22년에 코로나가 약해지면서 한국에 왔는데 학교에 복학하고 자가격리 때 임신한 걸 알게 됐어요. 남편은 스리랑카에 있고 저 혼자 돌아왔거든요. 고민하다 한국에서 아기를 낳기로 하면서 남편도 들어오게 됐죠. 저 혼자서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비자 받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두 번이나 불허돼서 아기 태어나고 5개월이 지나서야 들어왔습니다. 죽고 싶은 만큼 힘들었어요. 지금은 그날들을 생각하고 웃을 수 있지만 진짜로 고생 많았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써도 될 거라고 말해요. 남편이 오고 나서 이제 여유도 찾고 공부할 수 있게 됐어요. 다행히 남편은 누나의 아기도 봐줬기 때문에 육아를 잘하는 편이에요.



초기에 정착을 도와주신 분들이 있나요?
한국어 다음 스텝을 고민하고 있을 때 어학연수를 했던 선생님 두 분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6개월간 열심히 한국어 공부하고 토픽 성적을 받은 다음에 공부하고 싶은 과목이 있는 대학교를 찾아 진학하면 된다고. 그 과정까지 저를 밀어주셨어요. 윤설 선생님 그리고 이지훈 선생님. 윤설 선생님은 지금도 제가 도움을 요청하면 바로 대답해주세요. 저에게는 한국의 가족 같아요. 또 한 분은 임신했을 때 우연히 스리랑카 언니를 통해 알게 된 분인데 제가 혼자 있으니까 음식도 가져와 주시고 제가 학교 갈 동안 애도 봐주시고 그랬어요. 아기가 3개월 때 졸업작품을 준비해야 했는데 구미에서 바로 달려와서 애를 봐주셨어요. 정말 감사하죠.
외국인 커뮤니티는 따로 없지만 내가 아는 친구가 다른 친구를 소개하고, 그렇게 연결되어서 모르는 게 있으면 친구한테 물어보고 그 친구가 모르면 다른 친구에게 물어보는 식으로 해결하고 있습니다.

스리랑카에 있는 가족들은 어떤 일을 하시나요?
엄마는 항공사에서 32년간 일하다 은퇴하셨고 아빠는 사업을 하셨는데 지금 좀 편찮으세요. 여동생이 둘인데 막내는 의과대학 재학 중이고 둘째는 직장을 다니고 있습니다. 아빠는 70세, 엄마는 69세 결혼을 늦게 하셔서 우리를 늦게 낳으셨죠. 그래서 저희를 빨리 시집보내는 게 목표라고 하세요. 여동생들한테도 빨리 결혼하라고. 엄마가 늦게 하니까 힘들더라, 너희는 일찍 해라. 그런데 막내는 결혼 생각이 없어요. 졸업하고 빨리 외국으로 나가야겠다 그러고 있죠. 걔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의사가 되는 게 목표였고 우리보다 머리가 좋아요.

일상생활에서 힘든 점은 무엇인가요?
지금 영남대 근처 임당동에서 월세로 살면서 남편이 경제활동을 하고 저도 아르바이트해서 보태고 있어요. 초기에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청소일도 해봤어요. 경제적으로 다 도움이 되니까. 결혼하고 양가 부모님이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시는데 그게 없으면 못 살아요. 그래도 부모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일해서 생활비라도 버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스리랑카에서 여기까지 돈을 보내는 게 너무 힘들어요. 저희한테 바로 송금할 수 없어서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분들한테 부탁해야 하거든요. 우리가 스리랑카 돈을 주면 한국 돈으로 바꿔주는 식인데 계좌로 받아서 바로 환전이 안 되는 거예요. 스리랑카에서 IMF 문제가 있었고 경제가 너무 어려우니까. 제가 한국에 올 때는 괜찮았는데 지금은 국가 신인도가 떨어진 거죠. 최근에는 제가 학교를 안 다니니까 부모님께 부탁드리지 않고 아르바이트 있으면 하면서 그렇게 견디고 있습니다. 졸업하고 한 1년 정도 됐어요.

외국인으로서 차별을 경험한 적이 있으신가요?
제 피부 색깔을 보고 더럽다고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일자리를 구하느라 영남대 근처 식당들을 보고 있었는데 그때 아르바이트 구한다는 전단을 붙여놓은 식당이 있어서 들어갔거든요. 그런데 주인 할머니가 저한테 피부 색깔이 너무 더럽다고 오지 마, 저리 가, 우리 집에 오지 마, 이러고 쫓아냈어요. 너무 당황스럽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음식문화가 달라서 겪는 어려움은 없었나요?
어릴 때는 돼지고기랑 소고기는 아예 안 먹었어요. 집에서도 엄마가 요리해 준 적이 없어요.
나라에서 금지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집안 종교 때문에 저희 부모님이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안 드세요. 오리고기도 스리랑카에서는 별로 안 먹어요. 대신 닭고기, 생선. 섬나라니까 생선이 되게 많거든요. 지금은 고기라면 다 좋아해요. 대경대 기숙사에서 살 때는 직접 스리랑카 요리를 해 먹었어요. 영남대 다닐 때 원룸에서 자취했는데 혼자서는 식재료비가 감당이 안 돼서 조금씩 한국 음식을 하게 됐어요. 이제 김치볶음밥, 김치찌개는 잘 먹어요. 코로나 때 스리랑카에 2년 있었는데 한국 음식이 되게 먹고 싶더라고요. 콜롬버 근처 한국 식당을 찾아가서 비싼 김치찌개를 먹었죠. 지금은 잡채, 된장찌개도 만들고 아기 먹을 음식도 만들어요. 남편이 제육볶음을 제일 좋아하는데 제가 요리를 잘한대요. 물론 한국 음식과 맛이 다를 수는 있어요. 간을 어떻게 맞추는지 저는 잘 모르니까.

한국, 특히 경산에 대한 인상은 어떤가요?
경산은 계속 살고 싶은 곳이에요. 집 근처에 편의점도 있고 24시간 운영하는 마트도 있고 아기가 아플 때 근처에 병원이 많아서 되게 편해요. 떠나고 싶지 않은 동네예요. 아이 키우기도 좋아요. 경산역 근처에 있는 애육어린이집에 보내는데 아기가 재미있어해요. 저는 집에서 일해야 하는데 아기가 어린이집을 잘 다니니까 마음이 편합니다. 남편이 자연을 좋아해서 시간 날 때는 팔공산 갓바위를 자주 가요. 거기 풍경이 너무 예쁘잖아요. 집에 있으면 남편이 우리 팔공산 갈까 이래요. 영천 만불사도 갔다 왔고요. 한국은 스리랑카와 자연 풍광이 완전 달라요. 스리랑카 중심에는 높은 산이 있지만 수도 근처에는 높은 산이 없고 고향도 거의 평지라서 팔공산에 자주 가게 되는 것 같아요.

건축사 공부를 마치면 진로는 어떻게 되나요?
할 수 있으면 여기서 취직하고 연주권 딸 때까지 노력해 보고 싶어요. 제가 공부를 마치면 애는 이미 한국 문화나 한국 음식, 한국어에 익숙해져 있을 텐데 그때 스리랑카로 데려가면 적응할 수 있을까, 힘들지 않을까. 남편은 애가 좀 크면 저희 둘만 다시 스리랑카로 돌아가고 애 혼자 한국에서 살게 하자는데 엄마인 저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어요. 그래서 남편이 한국에서 살 수 있도록 한국어 공부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말이 필수잖아요. 제가 여기서 직장 다니면 남편이 애 보고 다 해야 하니까.

스리랑카에서 한국에 유학 오고 싶다고 하면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으세요?
유학생으로 들어와서 그냥 돈 벌고 그런 사람들도 있어요. 자기가 한국에 들어온 목표를 잊으면 안 돼요. 먼저 한국어 공부를 하고 토픽 성적이 되면 우리 출입국 사무소에서도 허락해 주거든요. 20시간 동안 일할 수 있어요. 돈을 벌고 싶으면 불법적으로 말고 합법적으로 해야 해요. 걸리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장담할 수 없잖아요. 한국 법을 존중해주고 항상 법을 지키고 살면 됩니다. 공부는 힘들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다 포기하고 그런 친구들도 있는데 그렇게 안 되게끔 마음을 잡고 열심히 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경산시 외국인 정책에 대해 바라는 점이 있나요?
외국인 아이들이 있잖아요. 지금은 어린이집 보낼 때 비용의 절반 정도 지원해 주시는데 어떤 사람들은 진짜로 그 절반을 내기도 너무 어려운 형편이에요. 학생비자나 동반비자로 와 있다가 아이를 낳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사람들에게 뭔가 도움을 주셨으면 해요. 한국에서 일해서 번 돈을 본국의 가족들에게 보내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또 유학생들은 대출 내서 오는 학생들이 많은데 그들에게도 도움이 필요합니다.

한국에서 정착한다면 어떻게 살고 싶으신가요?
한국에서도 유명한 건축가가 되고 싶습니다. 학교에서 건축은 공간을 쓸모 있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배웠어요. 제가 집을 짓는다면 오래 살고 싶은 집을 한국식과 스리랑카식을 합쳐서 만들고 싶어요. 또 스리랑카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박선영
온마을TV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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