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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에서 온 시아오리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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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오리(43) 씨가 운영하는 씽푸반점(사동)은 평범한 식당이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온 결혼이민자의 자립을 꿈꾸는 희망의 기지다. ‘씽푸’는 우리말로 ‘행복’. 음식을 먹는 사람도 만드는 사람도 행복하길 바란다고 했다. 중국에서 한국인 남편을 만나 아이 둘을 낳고 살던 시아오리 씨는 행복해지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가 지금은 자신처럼 행복을 찾아 한국으로 온 세계의 여성들과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외국인 강사이자 통역사에서 사업가이자 글로벌레이디협동조합 이사장으로 외연을 키운 시아오리 씨의 바람은 남을 돕는 쓰임 있는 삶이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고 오신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중국 서쪽에서 왔고요. 고향은 약간 라인 쪽인데 진시황 병마용 있는 시안하고 이제 황허강 마주 보고 있는 도시로 중국의 발원지라고 합니다. 한국에는 2010년도쯤 왔는데 당시에 4년 정도 한국과 중국을 왔다 갔다 했어요. 정착하게 된 건 2010년도 4월쯤입니다. 스물다섯 살에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서 애들이 일곱, 여섯 살 학교 들어가기 전에 왔습니다.
중국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어요?미국과 영국에 공장이 있는 드레스 디자인 회사에 다녔어요. 본사는 미국에 있고 저는 중국 상해에 있는 자회사에서 근무하면서 디자인이 나오면 공장과 계약하고 제조 단가 계산해서 넘기고 검사하는 일을 했습니다. 대학 졸업하고 실습 나갔을 때 아르바이트로 드레스 피팅모델을 하다가 정직원이 됐어요. 4년 정도 일하고 결혼했습니다.
남편과는 어떻게 인연이 되어 결혼하셨어요?제가 다니던 회사에 본부장으로 왔는데 처음 만났을 때는 한국사람인 줄 몰랐어요. 남편이 중국에서 유학해서 중국말을 잘해요. 계속 중국에서 살겠다고 약속해서 결혼을 했는데 나이를 안 물어보고 연애하다가 결혼할 때 보니까 저보다 열 살 이상 많았어요. 남편은 나이보다 젊어 보였거든요. 내가 속았다고 하니까 자기는 안 물어봐서 얘기 안 했을 뿐이라고. 하하.
한국에 오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있었나요?남편이 자기 회사를 차려서 나오고 저는 임신을 했어요. 기사도 있고 보모도 있고 생활은 괜찮았지만, 중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술을 많이 마셔야 하거든요. 남편이 매일 만취해서 오니까 계속 싸웠어요. 둘째한테 신경도 못 쓰고 자폐증세가 있는 걸 알아보지도 못했어요.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저 사람은 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산다고 하겠지만 저는 되게 힘들었죠. 시댁이 청도에서 감, 복숭아 농사를 짓는데 나무 냄새가 복잡한 마음을 평화롭게 해줬어요. 제가 먼저 한국에 부모님 계신 데 가서 살자고, 돈 있다고 행복하지도 않고 술 마시다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애들 생각하자고요.
청도에 처음 오셨을 때 적응에 어려움은 없었나요?큰 애는 시골에 있는 유치원을 좋아했는데 제가 생각보다 적응이 어려웠어요. 보수적인 시부모님과 문화적 차이가 너무 크니까 자꾸 부딪히게 되고, 남편도 중학교 때부터 떨어져 살다가 합치니까 많이 힘들어했어요. 두 달 만에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술 문제로 싸우게 되면서 한국으로 완전히 들어오게 됐습니다. 아이들도 한국 유치원이 자유로워서 좋다고 하고 시부모님도 보고 싶어 하셨어요. 따로 살아도 좋으니 들어오라고. 청도에는 한두 달 있었고 아이들 학교 때문에 경산으로 오게 됐습니다.
중국에 계실 때 한국어 공부를 좀 하셨나요?청도에 살 때는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 했어요. 시부모님이 중국어를 못 쓰게 하셔서 혼자 한국어를 배웠는데 높임말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때는 다문화센터도 몰랐고 시부모님은 아들이 결혼을 못 해서 외국인하고 결혼한 게 아닌데 남편한테 배우라고 하셨어요. 경산에 와서야 다문화센터를 알게 돼서 열심히 다녔지만 발음은 안 좋아요. 한국드라마 보면서 혼자 공부하느라 발음 교정을 못 했어요. 처음부터 좋은 선생님 만나서 배웠으면 발음도 좋을 텐데 아쉽죠.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남편은 아버님 농사를 물려받아 짓고 있어요. 직장에 다니면서 주식에 투자했다가 잘 안 됐어요. 저는 10년 넘게 다문화센터에서 중국어 수업, 통역도 하고 서울에서 다문화이해 전문 강사를 따서 해병대나 이런 데 특강을 나갔습니다. 대중 강의, 개인 수업, 화상 강의 다 했어요. 대학 강의를 나가면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더 전문적으로 하려면 발음도 고치고 석박사과정을 밟아야 하는데 그만뒀어요.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식당은 전부터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제가 먹는 걸 좋아해서 옛날부터 어디 맛있다 하면 가서 먹어보고 집에 와서 비슷하게 만들었어요. 강의하면서 협동조합을 만들었는데 중식당도 거기서 진행돼 23년 8월 사동에 문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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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아오리 씨가 운영하고 있는 씽푸반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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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은 언제 만드셨는지, 조합에서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알림장을 못 읽어서 애들 준비물을 못 챙겼다는 말을 듣고 우리가 뭔가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16년도에 열세 개 나라 여성이 함께하는 글로벌레이디협동조합을 만들었어요. 각자 가진 재능을 살려서 화상 교육, 통·번역, 언어 관련 일하고, 무역 수출도 준비했었는데 한 번밖에 못 했어요. 베트남 친구가 있어서 홍삼캔디를 베트남 약국에 수출했는데 코로나가 터지고 중단돼버렸죠. 실패해도 다시 도전하고 해야 하는데 결혼이민자들은 돈을 투자하고 유지하고 이런 게 어려워요. 조합원이 많아지니까 운영도 어렵고. 해산하고 계속할 사람들만 모아서 새롭게 시작을 준비하고 있어요. 지금은 외국인도 이사장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서류를 보내놨습니다.
중식당이 만들어진 과정과 운영이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하네요유튜브 찍으러 울산에 갔을 때 감독님이 괜찮은 식당 있다고 소개를 했어요. 밥을 먹었는데 딱 내가 하고 싶었던 중식집이었어요. 누구나 와서 먹을 수 있는 가격에 고급스러운 음식, 깨끗한 분위기에서 대접받는 느낌을 주고 싶거든요. 한국의 중식당은 비싼 데는 너무 비싸고 싼 데는 좀 지저분한 느낌. 여기는 중간 정도라고 생각해요. 체인점 받을 때 조합은 전체 의사를 모으기가 어려워서 동업 형태로 시작했어요. 여기 음식을 드시고 다들 행복하시라고 씽푸(행복)반점이라는 이름을 선택했습니다. 음식은 제가 직접 하고 직원 두 명이 있어요. 우리 마파두부는 본토 맛을 살려서 특이한데 맛있어요. 매콤한 크림스파게티 같은 해산물크림짬뽕도 엄청 인기 있고요. 경기가 어렵지만 적자는 아니니까 잘 굴러가는 거겠죠. 이게 잘되면 세계음식 밀키트 사업도 해볼 생각입니다. 외국인들 특히 여성들은 임신해서 자기 나라 음식을 먹고 싶은데 먹을 데가 없어서 너무 힘들어요. 통·번역은 할 수 있는 사람이 소수지만 음식은 다 할 수 있겠다 싶어서 계속 제안했었죠. 아직은 마음을 모으는 단계입니다.
아이 둘을 키우는 데 어려움은 없으셨나요?영남대에서 농업 전공하는 큰아들은 이달에 군대 가고, 둘째는 자인학교 다녀요. 한국에 와서 어린이집 선생님이 아이 검사를 받아보라고 해서 그때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아이한테 너무 미안해서 그때부터 발달장애 관련 공부도 하고 항상 데리고 다녔습니다. 오빠가 동생을 많이 챙겼어요. 매일 손잡고 나가고 동화책 읽어주고 가르치고 친구들 만날 때도 데리고 가고. 큰아들한테 저는 오히려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큰애는 선생님들이 다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라고 했는데 대구농업마이스터고를 갔어요. 대학도 집 가까운 데로 선택했고요. 엄마, 동생 생각하지 말고 네 미래를 생각하라고 했더니 학비, 기숙사비, 생활비 따지면 집에서 다니는 게 낫대요. 국적은 스스로 선택하도록 했어요. 아들이 초등 3학년 때 자기는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외국인으로서 경산에서 생활하기는 어떠세요?경산은 제2의 고향이죠. 중국에서도 고향 떠나 다른 도시에서 공부하고 일하고, 한 도시에서 10년 이상 살았던 적이 없으니까요. 경산에서 오래 살았고 센터장님하고 다른 아는 사람도 많고 너무 좋아요. 다만 제가 귀화를 안 해서 서류 문제가 좀 어렵죠. 처음 왔을 때는 중국을 낮잡아보는 시선이 많아서 상처를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너희 나라 이런 말들. 중국은 워낙 여러 민족이 섞여 있고, 소수 민족은 거의 외국인이라 나와 다른 게 아무렇지 않은데 한국은 유난히 단일 민족이라는 의식이 강한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단련돼서 ‘여기 살면 다 우리나라지 뭐’ 이렇게 생각합니다.
중국과 한국의 생활습관이나 풍습이 어떻게 다른가요? 중국은 지역마다 다른데 부모가 자식을 굉장히 뒷받침해줘요. 결혼하면 남자 쪽이 집도 차도 사야 하고 여자 쪽에 돈도 줘야 합니다. 결혼해서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무조건 남자 엄마가 와서 다 봐줘야 해요. 몸이 약한 여자가 아이를 낳아주는 것을 공덕이라고 생각하죠. 회사에 다닐 때 손님이 아가씨는 참 예쁜데 왜 한국 사람하고 연애하냐고 해서 이상하다 했었죠. 그것도 하필 경상도냐고. 그때는 한국 문화를 몰랐거든요. 통역을 제대로 한 건가 의심했죠. 중국에서는 안 그랬는데 한국에 와보니 남편도 한국 남자, 경상도 남자였어요. 이젠 제가 스스로 배워서 다 합니다. 어떻게 보면 고맙기도 하네요. 아들한테는 속옷, 양말 정도는 직접 빨래하고 밥 먹고 설거지, 정리까지 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공부는 못해도 이런 건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음식문화 차이도 있을 것 같습니다처음엔 먹을 게 없어서 너무 힘들었어요. 중국은 채소를 익혀 먹는데 여기는 고추, 오이, 당근 같은 채소를 썰어서 생으로 먹는 거예요. 중국에서는 밥하고 고기반찬 한두 가지, 볶은 채소 한두 개, 국이 기본이거든요. 그런데 어머님은 짜고 매운 된장찌개에 밥 비벼 먹으라고. 시골은 특히 요리 같은 게 별로 없고 잘 안 해 드시는 것 같아요. 중국은 길에도 먹을 게 많아서 출근하면서 사먹기도 하는데 경산은 진짜 별로 없어요. 그런데 또 중국 가면 된장찌개 먹고 싶다, 김치 먹고 싶다 이렇게 되더라고요. 중국은 음식을 많이 해서 대접하고 남기는 게 예의인데 이제는 그게 좋은 문화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음식 낭비고 쓰레기 배출도 많잖아요.
외국인 정착을 위해 경산시가 어떤 일을 해줬으면 하시나요?결혼이민자들이 이미 한국에 살고 있으니 가족들이 쉽게 올 수 있도록 해줬으면 좋겠어요. 한국에 놀러 오거나 유학,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내 딸이 여기 사니까 불법 체류 같은 문제도 없을 거잖아요. 이민자가 반듯하게 살고 있으면 보증이 되지 않을까요. 국제결혼 해서 어렵게 사는 사람도 많고 친정을 도와야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것 때문에 제가 상담, 통역도 하거든요. 결혼이민자가 잘 못살고 이혼해서 다른 불법체류자와 살고 이러면 문제가 됩니다. 고향의 가족이 오면 서로 의지가 되고 더 안정적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지기반이 있으면 남자 쪽에서 함부로 못 할 테고 이혼도 줄어들겠죠.
그리고 외국인 차별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경산에 온 지 20년이 된 분인데 아직도 차별과 무시를 당할 때가 많다고 합니다. 어렵게 시험을 보고 귀화를 하고 애국가를 불러도, 가족을 버리고 여기서 백 년, 천년을 살아도 여긴 내 나라가 될 수 없겠구나, 우는 거예요. 귀화했으니 고국도 못 가고 여기서도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랄까.
앞으로 목표나 바람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우리 한국이 잘됐으면 좋겠고 한국에 사는 모든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식당과 세계음식 밀키트 사업이 잘돼서 모두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결혼이민자들도 받지만 말고 스스로 일해서 도움을 받는 사람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