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빛문화재유산연구원·경산시가족센터·경산이주노동자센터·온나무·경산신문 공동기획 ⑦
<편집자주>
경산신문은 관내 생활하는 외국인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제안한 (재)한빛문화재연구원(원장 김기봉)과 5월부터 1년 간 외국인 생활상 조사 결과물을 지면에 싣는다.
이번 프로젝트는 경산시가족센터(센터장 정유희)와 경산이주노동자센터(소장 안해영) 등 관련기관이 컨소시움을 구성해 참여한다. 결과물은 단행본으로 엮을 계획이며, 지자체의 외국인 정책 수립에 도움이 되길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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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동포 안해영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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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해영 씨는 중국 길림성 길림시에서 태어났다. 평안도가 고향인 할아버지와 부산에서 태어난 할머니가 중국으로 이주하며 재중동포가 되었다. 스물한 살까지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식당일을 돕다가 1993년 산업연수생제도가 시작되던 해에 한국에 들어왔다. 연수생 자격은 1년 만에 상실했지만 같은 재중동포 남편을 만나 우여곡절을 겪으며 한국에서 살아남았다. 21년간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살았으나 재외동포에 대한 특례조치로 다시 체류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섬유 밥만 30년을 먹었다는 안해영 씨는 경산에서 얻은 섬유업계 인맥과 특유의 친화력으로 2년 전 섬유공장 사장님이 되었다. 한편, 동포이자 이방인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밑거름으로 경산이주노동자센터 소장을 맡아 외국인 노동자 권익 찾기에 앞장서고 있다.
한국에 오시게 된 계기와 당시의 상황이 궁금합니다.이모부가 한국에서 공무원으로 있었어요. 당시에 산업연수생제도를 처음 해보려고 하는데 만약 안 되면 좀 그러니까 조카인 저를 부른 거예요. 그래도 교포들이 중국에서 들어와 돈 벌어 가면 잘 살 수 있잖아요. 첫 연수생 5명이 다 친척, 가족이었어요. 혹시 이게 서류가 안 될 수가 있으니까. 그렇게 서울에서 1년 동안 컴퓨터 자수 일을 배우게 됐어요. 고향은 길림성 길림시, 김일성이 중학교 다닌 곳이라고는 하지만 정치적으로 영향을 받는 건 딱히 없었어요. 우리 집에서 식당을 좀 크게 해서 한국 손님, 북한 손님 다 왔었죠. 잘 사는 편이었어요. 남들은 밥을 못 먹어서 옥수수 먹었니, 뭐니 할 때 우리는 옥수수를 간식으로 먹었거든요. 대신 일이 너무 힘들어서 한국에 왔을 때 공장 일이 쉽게 느껴질 정도였죠.
한국에 다른 가족들도 와있는지, 중국에는 가족 누가 계시나요?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연세가 있으셔서 작년에 한국에 들어오셨어요. 우리가 4남매인데 재작년에 언니가 혈전으로, 형부는 암으로 돌아가셔서 조카 둘도 제가 한국에 데리고 와서 돌보고 있어요. 같이 살면 불편하기도 하고 우리는 사택이 또 있으니까 중방동에 집을 얻어서 어머니와 조카는 따로 지냅니다. 남동생 두 명은 지금 경기도 쪽에 있어요. 이제 중국 고향에는 시어른밖에 없어요. 남편이 흑룡강성 출신이거든요.
큰조카는 대학교 다니니까 그렇다 치고 중학생인 작은 조카 앞으로도 지역의료보험료가 13만원 정도 나와요. 엄마는 저한테 얹혀 있지만, 조카들은 적지도 않은 돈을 각자 내야 하는 거죠. 애들이 할머니 밑으로 들어가면 그냥 합치면 되는데 빨리 1가구로 인정을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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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해영 씨 가족. 남편 김광민(61세), 아들 김규동(17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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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는 어떻게 만나게 되셨어요?서울에서 연수를 1년 하고 사랑에 빠졌어요. 남편은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연수생으로 사출 일을 하고 있었어요. 다른 연수생들은 다 돌아갔는데 저는 남편이 있으니까 안 갔죠. 그렇게 미등록이 된 거예요. 연수생하고 그걸 연장해줘야 하는데 정부에서 문제가 생겨서 안 됐어요. 기한은 만료됐는데 혼자 가기는 싫어서 남편은 그때 합법이었으니까 그냥 남편 보고 눌러앉은 거예요. 저는 교포니까 말이 되잖아요. 사는 데는 지장이 없죠. 제가 얘기를 안 하면 아예 (동포인지) 몰라요. 서울에서 1년 살고 부산에 몇 달 있다가 바로 영천에 와서 섬유회사에 취직했어요.
경산에 정착하신 이유와 장단점은 무엇인지?제가 계속 섬유 일을 했는데 섬유가 영천하고 경산 이쪽으로 많잖아요. 경산에는 제가 먼저 오고 남편은 뒤에 내려왔죠. 사람들도 친절하고 살기가 좋아서 처음 자인에 집을 구해 살다가 그렇게 쭉 경산에 정착하게 됐어요. 그때는 물가도 쌌고 여름이 되면 옆집에서 과일을 자주 갖다 줬어요. 흠집이 난 건 못 파니까 다 먹기도 전에 또 갖다 주고. 진짜 인심이 너무 좋아요. 저도 사람들을 좋아하는 편이고. 사실 지방은 단속이 훨씬 덜 해서 그런 이유도 있었어요. 제가 합법적 신분이 된 게 아들이 초등학교 들어갈 때니까 10년쯤 됐네요. 단점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바깥에서 말 안 하면 그냥 한국 사람으로 아니까. 그런다고 일부러 숨기지도 않아요. 회사에 취직하면 바로 얘기하는데 불편한 점은 없었어요.
섬유공장을 직접 경영하신 지는 얼마나 되었나요?2년 조금 넘었네요. 인수는 아니고 그냥 세 든 거죠. 공장 자체를 임대했어요. 건물주의 오더가 제일 많아요. 그리고 다른 데 오더도 좀 있고. 연사니까 실을 꽈주는 거죠. 섬유만 30년을 하다 보니 노하우도 쌓이고 기계 손보는 거,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머리 쓰는 걸 좋아해요. 실이 끊어지는 걸 절사라고 하는데 그런 결함을 잘 잡거든요. 그런 데서 성취감을 많이 느껴요. 다른 공장에서 오래 일했는데 사업주들이나 책임자들이 ‘니는 남자면 뭐라도 하겠는데’ ‘공장 해봐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아는 사장님들이 도와줄게 해서 시작한 거예요. 아들의 영향도 있었어요. 아들은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잖아요. ‘엄마처럼은 안 살 거야, 여기서 계속 살고 싶어’ 그전에는 언젠가 중국에 가야 한다는 마음이었는데 아들이 안 가겠다니까 그러면 뭐라도 해보자. 나이도 있으니까 도와준다는 사람 많을 때 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그렇게 시작한 거죠. 작년에 경기가 그렇게 안 좋아도 올해는 잘 돌리고 있어요. 연 매출 3억 조금 넘는데 이것저것 빼고 나면 그렇죠. 직원은 고정으로 3명 두고 남편과 저도 공장에서 일합니다.
공장을 운영하시면서 초창기에 어려움은 없었나요?현장 일만 해서 사무실 업무 모르는 거 말고는 딱히. 아들이 고등학생인데 엑셀작업 등 많이 도와주고 있어요. 아,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이 사업을 한다는 것만으로 주변에서 조금 안 좋게 ‘한국 사람도 못 하고 있는데 외국 사람이 해봤자 얼마나 하겠나’ 수군거리는 건 있었어요. 어느 정도 부딪혀 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그런 건 상관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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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사공장을 돌아보고 있는 안해영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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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자영업자로서 느끼는 어려움은 무엇인가요?우리는 근무시간이 짧아요. 왜냐면 더우니까 오전에만 집중해서 일하고 점심 먹고 그냥 바로 퇴근하고 이러거든요. 새벽에 오면 시원하잖아요. 그래도 월급 200만 원 넘어요. 한국 사람들 최저임금 안 지키는 게 가장 싫어요. 제가 이주노동자센터에 있으니까 사장님들하고 싸우는 거 따지는 거 나서서 하는 편이에요. 대우해 줄 건 해주고 일을 시켜야 하는데 대우는 안 해주고 요구만 하면 안 되잖아요. 우리 공장이 근무시간은 제일 짧아도 근처에서 월급은 제일 셀걸요. 그런데도 사람 구하기가 어려워요. 제가 팔을 다쳐서 수술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도 일하고 있으니까.
우리 공장 기계가 오래된 거라서 요즘 이런 기계가 많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런 기계를 배우려는 사람도 없고 기존에 있던 사람들은 다 연세가 드셨고. 지금 여기 앞에 있는 사람들 다 육십 넘었어요. 젊은 사람들 외국인 노동자 때문에 일자리 없다는 건 다 거짓말이에요. 자기네가 안 하려고 하니까 외국인을 대타로 쓰는 거죠. 진짜 조건 좋은 데는 외국인 없어요. 조건 안 좋은 회사만 외국인 쓰는 거지. 사람을 도저히 못 구하니까. 일자리가 필요하면 그런 데 가서 일하면 돼요.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새로 생긴 습관 같은 게 있나요?이게 서서히 녹아드는 거라서 습관이 새로 생겼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너무 일찍 왔고 첫 사회생활이었잖아요. 남들은 12시간 2교대 하는데 힘들다고 난리인데 저는 너무 재미있었어요. 식당이 워낙 크고 장사도 잘됐던 데라 12시간보다 일을 더 많이 했거든요. 그리고 새로운 걸 배우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원래 한국말을 했기 때문에 딱히 남들하고 불편한 것도 없었고, 사람 좋아하고 제 성격 자체가 밝거든요.
한국에서 살고 싶어하는 동포가 있다면 어떤 조언을 해주실지?젊은 사람들은 예전하고 달라요. 중국이나 한국이나 똑같아요. 열심히 하면 되는데 일단 자기 편한 것만 생각하니까. 예전에는 사람들 일자리도 많이 구해줬어요. 그런데 구해주고 제가 욕을 먹으니까 사장님들한테. 남들 하는 만큼만 열심히 해주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처음에는 한국 애들만 그런 줄 알았죠. 너무 오냐오냐해서 그렇다고. 중국에 서너 번 가보니 똑같아요. 안 시키면 안 해요. 열심히 일해라. 성실해라. 그건 기본이죠.
한국 생활할 때 이런 건 주의해라 하는 게 있을까요?한국법, 중국법, 외국법 다 다르잖아요. 한국 법을 잘 지켜줘야죠. 또 한 가지 중국은 바깥에서도 훌렁훌렁 막 벗는데 여기서는 그런 거 진짜 조심해야 해요. 전에 중국 갔을 때 적응이 안 돼서. 하하. 지금도 아침에 시장 가잖아요. 그러면 웃통 벗은 사람 많고요. 잠옷 바람으로 다니는 사람들도 많아요. 이 사람들은 그냥 옷만 걸치면 되지 그걸 잠옷이라고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한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오히려 중국에 가서 제가 적응을 못 했어요.
경산시가 외국인들에게 지원해 줬으면 하는 게 있나요?재외동포로서 불편한 게 없으니까 잘 와닿지는 않네요. 다른 나라 분들이 힘들어하는 부분은 경산시가 아니라 출입국이나 이런 데서 하는 거고. 사업장 이동이라든지 지자체가 나서서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어요. 저 같은 경우에도 기능이 어느 정도 되니까 사업을 하는 거지, 기능이 안 되면 하고 싶어도 못 하잖아요. 오래 계신 분들일수록 다들 기술, 자격이 있는 사람일 텐데 미등록이라는 이유로 단속하면 집에 몇 달씩 숨어 있어야 되고. 그러면 사업주한테 손해거든요. 섬유는 사양산업이에요. 해마다 저 집 언제 문 닫을까. 외국인 다 잡아가면 일할 사람 진짜 없을 겁니다. 기능이 있는 사람들보다 양성을 쓴다는 정책은 이제 정부에서 바꿔야 하는 거죠.
지자체에서 할 수 있는 건 그나마 괜찮아요. 보건소에서 그것도 해주잖아요. 미등록 노동자도 건강검진 해주는 지자체는 경산시 빼고는 거의 없을걸요. 저 안산이나. 제가 진짜 바라는 건 외국인 노동자들을 차별하지 말고 동등하게 직장도 자기 마음대로 구할 수 있도록 해줬으면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건 지자체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한국에서 이루고 싶은, 꿈꾸는 미래가 있나요?영주권 신청할 준비를 하고 있어요. 영주권을 신청하고 2년이 지나면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죠. 일반 외국인들은 시험도 쳐야 하고 복잡한데 교포들은 비교적 쉬워요. 음주운전이나 일정 금액 이상의 벌금형 같은 범죄 이력만 없으면 돼요. 아들은 그동안 방문 동거인으로 되어있다가 올해 재외동포비자를 만들었어요. 대학에 가야 하니까.
공장은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 나이 들면 촌에 집 지어서 살고 싶어요. 아들은 혼자서도 잘할 것 같고. 지금부터 서서히 준비하고 있어요. 땅도 보러 다니고. 집을 지어도 자인이나 남방동, 이 근처에서 살 거예요. 아는 사람들이 전부 지금 직장 동료들이고 예전에 같이 일하던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땅값이 내렸다고 해도 집 지어 살고 싶은 그런 땅은 또 안 내리네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