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벽했던 시골에 살았던 어린 시절, 설날이면 가마솥에 물을 끓여 형 누나 동생이 차례로 땟국물이 둥둥 뜬 물에서 목욕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도시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친구들은 목욕탕에서 어른들 손을 잡고 때를 밀고 이발소에서 이발을 했다고 들었다. 처음으로 목욕탕에라는 데를 간 것도 아마도 중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시장 입구에 있었던 은하탕, 수정탕과 서상길의 안전탕은 사라졌지만 사라진 안전탕을 기억하려는 사람이 있다. 서상길의 안전탕 막내딸 안주희(61세, 사진) 씨를 이주일의 경산사람으로 만났다.
경산 안 부자의 먼 친척뻘 되는 안 씨는 옥실에서 2남3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철도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4남3녀의 장남이라는 무거운 책임감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어머니 몰래 전답을 모두 처분해 당시 경산 최고의 번화가였던 서상동 135-16번지 목욕탕을 매입해 가족들과 이사했다. 일본식 교육을 받았던 아버지는 안씨 집안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는 ‘安田’에 탕을 붙여 안전탕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제가 태어날 즈음에 목욕탕을 시작해서 고2 때까지 17년 정도 목욕탕을 운영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후에 탁구장, 독서실로 개조해 한동안 살았습니다” 서상동에서 태어난 또래들은 모두 이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무료하면 남천거랑에 나가 멱을 감곤 했던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경산초와 여중을 졸업하고 대구로 유학, 사범대를 졸업한 막내 주희 씨는 포항에서 교편생활을 하다 코로나 때 명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와서 지역신문사에서 서상길을 소재로 책을 만든다는 소식을 올케로부터 들었다. “고모가 그림 그리기 좋아하시니 참가해 보시죠?”
큰오빠는 안전탕 문을 닫고 문구점을 시작했다. 문구점 이름은 ‘안스문구’다. 오거리에 있는 이 문구점 이름도 안씨 집안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어버지에 이어 아들도 집안을 잊지 않았다. 장남들의 집안사랑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안 씨가 기억하는 서상길은 따듯하다. 읍사무소 앞에 있던 대구식당에 친구가 살았고, 경일백화점 막내도 친구였다. 만화방에서 만화에 빠져있던 기억도, 설이 다가오면 떡방앗간 앞에 선 긴 줄도 생각난다. 집안 어른이 땅을 희사한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기억도 또렷하다.
“거래처인 경산신문사에서 서상길을 소재로 그림책을 만들려고 하는데 스케치북과 전용펜을 구해달라는 주문을 잊지 않고 시누이에게 전해 준 올케 덕분에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덕분에 제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안전탕을 복원해 서상길의 주요 건물이었던 중앙이용소-경일백화점-강남제재소와 연결해 서상길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억 한 켠에 이빨처럼 빠진 부분을 채울 수 있게 됐습니다. 1년 전에 어반스케치를 시작해 이제까지 부담 없이 그렸는데 막상 책에 실린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앞섭니다.”
지금은 쇠락한 원도심의 골목길이지만 한때 한 도시의 영광을 짊어졌던 서상길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안주희 씨의 꿈이 영글어가고 있다. 경산시민 10여 명이 그린 ‘서상길 그림책’은 오는 8월쯤 완성돼 도내 작은 서점에 깔리고 이윽고 서상길과 마을을 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