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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호 한국인문학진흥원 부원장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인문학박사 |
경산은 알다시피 기원전을 전후해 압독국이라는 고대국가 이전의 정치체가 발전했던 곳이다. 이 시기 압독국의 존재는 경산이 위치한 금호평야를 떠올리면 당연해 보인다. 경산에서 발견되는 압독국의 유적은 신라에 병합된 이후의 것이나 자치적 지배권을 인정받았기에 압독국의 독자적 문화가 유지되었다고 보고 있다. 물론 신라의 영향을 받아 변화가 일어나기도 했겠지만 문화적 기반은 존속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지만 임당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인골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얼굴이 복원된 적이 있다. 사실 우리나라의 지질적 특징으로 인해 고인골이 남아 있는 사례가 드문데 임당동 고분군이 자리 잡은 지질이 암반이어서 바위를 파서 암광목관묘의 방식으로 고분을 조영한 결과 인골이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유물에 흥미를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뿌리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게 된다. 좁게는 우리 지역에서부터 넓게는 우리 민족 즉, 한반도의 민족집단은 어디에서 왔을까에 대한 궁금증이다.
기원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우리 역사의 유구함과 광대함으로 확장되어 민족예찬론으로 비뚤어지기도 하지만 정체성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여기서 민족 기원론을 말하는 것은 너무 어렵기도 하거니와 적절하지도 않다. 대신 임당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과 관련해 접근해 보는 것은 나쁘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유물 중 기원 내지 영향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적지 않은데 그 가운데 복골(卜骨)이 전문가가 아닌 시각에서는 흥미롭다.
복골은 간략하게 말해 점을 칠 때 사용하는 동물의 뼈를 가리킨다. 신석기시대 이후 동물의 뼈를 불에 그을리거나 태워서 일어나는 균렬 모양 또는 뼈 그대로의 색깔과 모양에 의거해 미래의 일을 예견하거나 정하는 습속이 널리 분포했다.
이 중 전자의 예가 동유럽, 북아메리카, 중앙아시아, 동북아시아 등지에서 발견되는데 십수 년 전 다큐멘터리에서 몽고에서는 현재도 양의 견갑골으로 점을 치는 풍습이 남아 있다고 한다. 우리가 한자의 기원으로 알고 있는 갑골문이 바로 복골과 복갑(卜甲)에 점의 결과를 새긴 것으로서, 중국에서는 복골이 산동성을 중심으로 나타나다가 주나라 중기 이후로는 시초점(蓍草占)이나 서죽점(筮竹占)으로 대체되었다.
임당동 고분에서도 복골이 출토되었는데 복골의 분포는 전국적이지만 한정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영남지역에서는 주로 사슴의 견갑골이 사용되고 후대로 갈수록 멧돼지, 소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아마 사냥 짐승에서 기르는 동물로 바뀌어져 간 듯하니 북방문화에서 항상 등장하는 사슴에서 지역의 가축으로 재료가 대체되었다고 이해된다. 기원을 논할 때 흔히 언급되는 북방문화는 시베리아 초원지대를 통해 형성되고 확산된 문화를 가리킨다. 사실 이 북방문화라는 용어도 따지고 들어가 보면 실체가 불분명하기는 하나, 문화의 영향과 혼합이라는 본질적인 관점에서는 유효하다.
복골이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중국 요하 상류인 서납목륜하 북쪽 오이길목륜하 유역이다. 이른바 부하문화(富河文化)로서 지금의 내몽고자치구에서 신석기시대 기원전 2700년 경에 성행한 문화이다. 추정하기로는 이 복골문화에서 은나라 갑골문의 복골이 나왔다고 하니, 은나라 출토 인골이 중국 화하족의 인골과 다른 특징을 보인다는 견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중요한 점은 초기철기시대 직후의 경산에서는 복골이 사용되었고, 이는 북방에서 폭넓게 행해지던 문화였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유라시아 대륙의 동남단인 한반도에서도 동남쪽에 위치한 경산의 지리적 위상에서는 당연하기도 하다. 경산시립박물관의 전시실의 복골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 짧게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