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의 무형문화재는 모두 43개, 이 가운데 농악이 차산농악 보인농악 무을농악 3개다. 이 가운데 가장 젊은 보유자인 차산농악 김태훈(57세, 사진) 기능보유자를 이주일의 경산사람으로 만났다.
김 보유자는 영천시 도동에서 2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나 인근 북안면으로 잠시 옮겼다가 2살 때 포항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이들이 바닷가의 거친 말투를 배울까봐 대구로 이사해 침산동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제과점, 안경점을 차렸다가 면서기였던 작은 할아버지가 대서방을 차리면서 시작한 도장새기는 일을 배워 마지막에는 도장방을 오래 운영했다.
침산초와 대건중, 영신고를 졸업하고 학원 민주화 바람이 거세던 87년 영남대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입학과 함께 민속보존연구회(민연반)에 가입한 김 보유자는 리포트로 졸업시험을 대신할 만큼 전공은 뒷전이었다. 민연반은 차산농악이 무형문화재로 등록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한 당시 문화인류학과 김택규 교수의 지도로 78년에 문화인류학과 중심으로 만들어진 풍물동아리였다. 김택규 교수는 경산자인단오제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제12기로 민연반에 가입한 김 보유자는 상모와 북잽이로 이름을 날렸다. 민연반은 당시 교내 동아리인 연희패 신명이나 놀이패 마당과는 달리 집회와는 일정 거리를 두었다.
“개인적으로 집회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있었지만 동아리 차원에서는 거의 참가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신 봄에 여는 등롱제와 가을 추계발표회를 통해 주로 농악이나 탈춤을 교내에 소개했습니다”
연희패 신명과 놀이패 마당은 학원 민주화 투쟁이 극렬하게 타오르던 89년 신명마당으로 통합돼 영남대 풍물패를 이끌었다.
“당시 신명 소속으로는 현재 국악협회 경산지부 박은숙 지부장이 있었고, 마당에는 자인팔광대에서 말뚝이역을 맡고 있는 윤철준이 있었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김 보유자는 이번에도 물리학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차산농악 김오동 보유자로부터 본격적으로 쇠를 배우기 시작했다. “대학에 입학한 87년도에 처음 뵈었지만 제대 후부터는 매일같이 따라다녔지예”
그러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갓 창단한 사물놀이패 진동에서 2년 정도 활동하다 그만두고 삼아기업이라는 자동차부품회사에 취업했다. 자리를 잡아가는데 느닷없이 IMF가 찾아와 2년 반 만에 실업자가 됐다. 그때 김오동 선생이 김 보유자를 불렀다. 80년에 경북도문화재로 지정된 후 잘 나가던 차산농악에 쇠를 치던 사람들이 돌아가시고 흔들리고 있었다.
98년 차산농악에 입단한 김 보유자는 상모, 쇠, 북 닥치는 대로 잡았다. 전수를 담당하는 조교를 하다가 2002년 김오동 선생이 돌아가시고 2008년 차산농악보존회 회장을 맡았고, 10년만인 지난 2017년 도문화재 가운데 최연소 인간문화재인 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김 보유자가 차산농악에 입단하면서 2007년 첫 공개행사를 진행했다. “무형문화재는 매면 공개행사를 의무적으로 해야 했지만 김오동 선생의 권위에 눌려 아무도 공개행사를 하라고 하지 못했지예”
차산농악 전수조교, 보유자를 거치면서도 경산의 우리 문화 평생교육에도 20여 년간 헌신했다. 여성회관 사물놀이반은10년째, 문화회관 사물놀이반은 올해로 17년째 가르치고 있다. 여기 제자 가운데 차산농악 이수자도 있다. 그러면서 진량 보인농악이 지난 17년 도지정문화재로 등록되는데 큰 힘을 보탰다.
“상쇠가 있으면 95% 정도 복원이 가능합니다. 판과 판을 연결하는 것이 상쇠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욱수농악 상쇠가 압량사람이듯이 사방 100리 안에 농악은 비숫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욱수나 고산, 보인농악은 서로 비슷한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