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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호 한국인문학진흥원 부원장,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인문학박사. |
3~4년 전 경산시에서 열린 전국 규모의 행사에서 경산시가 인구가 증가하는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라는 시장님의 자랑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우리나라 대부분 지역이 급격한 인구감소를 겪고 있는 속에서도 경산의 시세(市勢)는 예외적이라는 사실에서 ‘옛날부터 경산은 그러했는데…’라는 생각이 났다. 경산은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중심지의 역할을 맡은 적은 없었으나 고대로 올라갈수록 사람들이 많이 모여 큰 세력을 형성한 곳이었다.
경산은 잘 알다시피 삼한시대 압독국 또는 압량국이 자리 잡은 곳이다. 삼한시대는 초기 철기시대에서 삼국시대 이전까지 시기로서 BC 100년경~AD 300년 경에 해당한다고 한다. 압독국은 이른바 소국 중의 하나인데 역사기록에 전하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서 유적과 유물이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재가 그러하듯 압독국의 것도 도굴의 여파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도굴꾼들이 금동관을 비롯한 중요한 유물들을 해외로 밀반출하려다가 적발되었던 것이다.
영남대학교 북편에 있는 임당동·조영동·부적리 고분군 일대를 가보면 역사에 문외한인 사람도 왜 사람들이 약 2000년 전에 이곳에 나라를 세웠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이들 고분군에 올라 보면 사방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충적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시에 현재 남아 있는 고분군 주변으로 밀집되어 있었던 많은 고분들이 보이지 않는 안타까움도 느끼게 된다. 이 고분군에 대한 학술조사도 지속되지 못한 채 중단과 재개를 거듭하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서 안정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고 한다.
다행이기는 하지만 그 사이 과거의 타이캡슐을 얼마나 많이 놓쳐버렸을까! 도굴과 방치 등으로 훼손된 고분들이 수없이 많은데도, 발굴된 유적과 유물만으로 경상도의 대표적 제수(祭需)인 상어고기가 그때부터 제사상에 올려졌음을 알 수 있었고, 당시 2~30대 여성이었던 무덤에 묻힌 한 사람의 얼굴이 복원되기도 했다. 또한 순장의 흔적이나 기타 유물들로 미루어보아 북방문화와의 연계성이 확인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발굴된 인골을 대상으로 최신 유전자 분석법으로 우리 지역 선조들의 기원이 밝혀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고분들이 암반 위에 조성되면서 물이 차 인골 주변에 진공상태를 만듦으로써, 산성 토양인 우리나라에서 고인골이 드문 일반적인 현상과 달리 인골이 제법 나왔다고 한다.
최근 2017년에 하양 대구가톨릭대학교 북쪽의 양지리에서 고고학계를 떠들썩하게 하는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대규모 택지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문화재발굴 전문기관에 의해 지표조사가 진행되고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면서 삼한시대 초기의 유적이 확인된 것이다.
특히 20대 남성의 무덤으로 밝혀진 목관묘에서 옻칠을 한 유물들이 부장품으로 나오기도 하여 당시 지배세력의 수장급 묘로 추정되고 있다. 이 일대 20군데 넘는 곳에서 청동기~조선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양지리 목관묘는 전문위원들에 의해 보존 조치로 결정되었다. 우연히 이를 알게 되어 얼마 전에 현장을 찾아가 보았다. 보통 구제 발굴 후 학술적 중요성이 낮을 경우 유적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사례가 대부분이므로, 어떻게 되어 있는지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양지리를 가보니 10여 년 전에 들렀던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신축한 고층아파트가 서 있고 그 사이로 빈터가 일부 남아 있을 뿐이었다. 디지털경산문화대전에 설명된 내용을 근거로 찾았으나 1시간 여 헤맨 끝에 겨우 하주초등학교 앞에서 몇 개의 조형물과 사진 등을 살필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도 잘 모르는 데다가 횡단보도 중앙의 정원에 ‘하양 양지리 1호 목관묘 발굴지’라는 작은 글씨의 입간판이 서 있었기에 모르고 가면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인도변에 조성된 작은 규모의 복원·전시 공간에는 눈에 잘 띄는 안내판도 없었다.
기왕에 어렵게 이러한 공간을 만들었는데 적극적으로 알리는 표지가 없는 것은 생각의 부족이라고 판단된다. 한편 입간판 가까이에 성혈이 십수 개 새겨진 고인돌의 덮개돌이 옮겨져 있었으나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유적이나 유물이 지닌 학술적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뜻은 아니다. 일반인들의 무관심을 탓하기보다 이러한 현장을 시민들의 일상 공간과 연결되도록 하는 마무리가 아쉽다는 것이다.
이 지적은 임당동·조영동 등 고분군에도 적용된다. 근처까지는 내비게이션으로 찾아갈 수 있으나 정작 들어가는 입구나 주차장을 알기 어렵다. 발굴과 현장 보존 등도 국민 세금으로 이루어진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최대한 일반 시민들이 찾고 관심을 가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