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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인문학 권영호

서원을 찾아서

경산신문 기자 입력 2021.11.10 18:14 수정 2021.11.10 23:33

 
↑↑ 권영호 한국인문학진흥원 부원장,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타지역에 비해 우리 경북에 월등히 많은 문화재 중에 서원이 있다. 향교가 군소재지와 같은 중심지에서나 볼 수 있는 데 비해 서원은 시나 군 내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멀리서 2층 형태의 누각과 함께 여러 채의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면 거의 서원이다. 그런데도 흔치 않아 보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서원이 조용하고 앞이 트인 곳에 자리 잡고 있어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다.

서원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사실 부정적인 인식이 꽤 자리 잡고 있다. 2년 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소수서원을 비롯한 9개의 서원이 등재되면서 다소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뀌기는 했으나 아직 조선시대 당쟁의 온산이니 하는 인식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양반들이 향촌사회에서 대접받는 만큼의 책무는 다하지 않고 서원을 기반으로 세력화하고 이익집단화 했다는 평가가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비판은 서원 건립의 확산에 따른 역기능에 기초하고 있다. 잘 알다시피 서원의 시작은 인재 양성이었으니, 지방의 공립교육을 맡은 향교가 양반 자제들에 대한 교육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나타난 것이었다. 서원의 의의에 대해 말하자면 교육 기회의 평등을 실현했다는 점을 긍정할 수 있다.

지금도 중앙과 지방의 차이 중 교육 여건의 차이가 가장 큰데 15~6세기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원활한 교재 공급, 면학 분위기, 체계적 교육 관리, 충실한 교육시설 등 서원이 갖춘 면모는 지방의 부족한 교육여건을 보완할 수 있었다.
서원은 순기능이 더욱 많은 교육기관이었다. 조선 전기만 해도 교육에 필요한 교재 즉, 사서오경이나 소학, 가례 등은 쉽게 구하기 어려웠다.
서원이 시설을 마련해 서적을 간행하고 보관하는 기능을 수행했음은 잘 아는 사실이다.

또한 집이 멀거나 매일 오가기 어려운 학생들은 숙식이 문제였는데 서원에는 숙사를 두어 이러한 문제를 해결했다. 서원의 숙사인 동재(東齋)니 서재(西齋)니 하는 말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가 되어 있다.

이외에도 서원의 입구에 있는 문루(門樓)와 같은 전인교육에 적합한 시설이 갖춰져 있고 교육 관리를 위한 체계적인 조직이 이루어져 있어, 지방에서는 서원에 들어가 공부하는 것이 일차 목표였다.

물론 이러한 기능은 향교에서도 어느 정도 수행했으나 문제가 적지 않게 발생했다. 예를 들면 숙식의 경우 학생 수가 많아 다 수용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재정이 부족하여 음식의 질이 낮고 질병이 발병하기도 했다.

또한 교수자를 중앙에서 파견하다 보니 가기를 기피해 교육의 연속성과 교수자의 수준이 떨어지는 문제점도 나타났다. 이와 같은 등등의 사정은 지방의 문인과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개설된 서원에서는 상당 부분 개선될 수 있었다.

교육시설의 확대와 확충에 가장 필요한 재정 확보도 나라나 지방관아의 공식적인 보조와 지방 유림과 유지들의 원조로 해결되고, 사액서원의 경우 나라로부터 토지 외에 서적도 하사받아 경비를 줄일 수 있었다.

서원은 교육 기능이 사회적으로 긍정되면서 이를 바탕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발전에는 서원이 지닌 지역의 선현(先賢)에 대한 제사 기능이 한몫을 했다고 보인다.

그 구체적인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텐데, 이를 우리가 사는 경산의 서원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경산의 서원 중에 꽤 유명한 서원이 있으니 금호서원(琴湖書院)이다. 임금이 현판의 글씨를 하사한 사액서원이므로 제향하는 인물이 사회에 기여한 바가 컸음을 알 수 있다.

금호서원의 주향(主享)은 경암(敬庵) 허조(許稠, 1369∼1439)로서 동시대 청백리로 유명한 황희 못지않게 청렴과 강직을 실천한 분이다. 조선초 왕조의 안정적 발전에 크게 공헌하여 특히 고려의 불교사회를 유교사회로 전환·정착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허조가 우리 지역의 인물인데도 귀에 익지 않은 이유에는 바른 말을 자주 하고 때로는 왕도 수용하기 어려운 직언도 서슴지 않은 행적이 있다고 보인다. 태종과 세종은 이러한 허조를 심하다고 싶으면 물러나게 했다가 반드시 다시 불러 중책을 맡기고는 했다. 원칙과 소신보다 자신의 안위를 우선했다면 나타나기 어려운 장면이다.

허조의 일관된 처신은 자연히 자손들에게 스며들어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과정에서 아들 허후(許詡)와 손자 허조(許慥)는 명분과 의리를 철저하게 실천했다.

의리사상을 말할 때 명분은 정신적으로 높은 가치이나 신체적·물질적으로는 낮게 실현된다고 하니, 거제도로 위리안치된 허후는 결국 처형되고 단종복위에 깊이 관여한 허조는 자결을 택함에 따라 가문의 지속조차 어려운 역경에 이르게 된다. 금호서원은 허조와 허후·허조 부자의 바른 사회의 정착에 대한 이러한 헌신 속에 설립된 서원임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다.

현재 금호서원은 북쪽으로 장군봉을, 남쪽으로 금호강을 끼고 있는 하양 부호리에 있다. 마을 입구에 허후·허조 부자의 충렬을 기리기 위한 정충각이 세워져 있다.
특이한 점은 금호서원에 할아버지 허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데, 허씨 문중의 남자들 사진을 모아 과학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라고 한다. 고개를 숙이게 하는 행적을 남긴 선조에 대한 후손의 정성이 감동스럽다.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를 받은 허조는 매년 2월에 향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금호서원은 1684년 금락동에 창건되었다가 1724년에 서사동으로 이건되고, 정조 때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대원군 때의 훼철을 거쳐 1923년 지금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서사동에는 유허비가 보호각 안에 세워져 있다. 금호서원을 둘러본다면 비록 주변경관이 주는 감흥은 부족하지만 마음속으로 느끼는 감동은 작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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