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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는 이북에 부모 형제와 고향을 두고 내려오신 한 많은 실향민이시다. 열 여덟 꽃다운 나이에 낯설고 물선 곳으로 내려와 의지할 곳 없이 혈혈단신으로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생을 하셨다.
이제 자식들 다 제 짝 찾아 주고 손주들 크는 재미 보며 조금 편히 쉬시려나 했는데 느닷없는 불청객처럼 몹쓸 병이 어머님을 찾아 왔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어느 날 어머님은 황달이 너무 심해서 병원을 찾으셨다. 하지만 별 거 아닐 거라고 찾아간 병원에서 어머니는 담관암 진단을 받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시한부 인생 선고가 어머님께 내려진 것이다. 짧으면 3개월 길면 5개월 쯤 살 수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 TV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황당한 현실 앞에서 우리가족은 우리의 모든 것을 내놓아서라도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성공률이 낮은 수술이지만 수술만 잘 되면 몇 년 정도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암이 뼈 속으로 전이되지 않았다는 조건 하에 가능한 수술이었다. 검사 결과 어머님은 다행히 뼈 속까지 암이 전이되지는 않았고 우리 가족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가족회의를 한 끝에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문제는 어머님의 연세였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수술을 해서 과연 잘 회복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담당 의사도 처음에 고개를 저었다. 최악의 상황일 경우 환자가 회복되지 못하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당신의 병이 암이 아니라 치료만 잘 받으면 나을 수 있는 병이라고 여기고 계시는 어머님의 삶에 대한 의지가 너무나 강하셨기에 의사도 어렵게 수술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 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어머님의 수술 날짜는 10월 6일로 잡혔고 수술 준비를 위해서 어머니는 미리 입원을 해야만 했다. 그때가 10월 2일이었다. 그날은 바로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이 열리던 첫 날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는 노대통령 내외의 모습이 중계되고 있었다. 정말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전후 세대인 나도 이렇게 가슴 뭉클한데 고향이 북녘인 어머님은 얼마나 감회가 새로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창백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어머님의 볼은 상기되는 듯 했고 어머님은 무엇인가 눈에 담으려는 듯 텔레비전에서 봄처럼 눈을 떼지 못하셨다.
그렇게 미리 입원한 4일 동안 수술에 필요한 모든 검사를 마치고 어머니는 6일 아침 7시 30분 수술실에 들어 가셨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어머님께 “어머님 걱정 마세요. 다 잘 될 거예요. 그리고 어머님은 강한 분이시잖아요. 그러니까 아마 수술도 거뜬히 이겨 내실 거예요.”라며 어머니의 손을 꼬옥 잡아 드렸다. 어머니는 대답 대신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여 주셨다.
하지만 예정 수술 시간인 10시간이 지났는데도 수술은 끝나지 않았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온갖 생각들이 실타래처럼 엉켜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난 울면서 어머님이 힘든 수술을 꼭 이겨 내게 해달라고, 그래서 완쾌하시면 금강산에 모시고 가겠다는, 그토록 꿈에 그리시던 고향 땅을 밟게 해드리겠다고 한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눈물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어머님의 수술은 12시간을 훌쩍 넘기고서야 끝이 났다. 수술을 끝내고 나오는 의사 선생님은 암이 임파선에는 전이되지 않았지만 간 문맥에 전이가 되어서 그 부분을 제거한다고 시간이 좀 더 걸린 거라고 하셨다. 4층 수술실에서 5층 중환자실로 옮겨진 어머님은 한동안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셨다. 잠시 뒤 어머님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어멈아, 여기가 어디고?’라고 하시는 데 쉴새없이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우선 그 힘든 수술을 잘 견뎌내신 어머님이 고마워 눈물이 났고 울긋불긋 단풍 들면 어머님이 그토록 가고 싶어 하시던 북녘 땅에 꼭 한 번 모시고 가겠노라고 어머님께 약속했던 것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나에게 주신 게 고마워 또 눈물이 났다.
수술이 잘 된 것으로 1차적인 고비는 넘겼지만 산 너머 산이라더니 이제는 수술 후유증이 문제였다. 중환자실에서 일반실로 옮긴 어머님은 며칠 동안 거의 아무 것도 드시지 못하셨다. 매일매일 알부민을 비롯한 4~5개의 링거를 맞으며 하루하루 버티셨다. 물도 마시면 다 토해 버리기를 여러 날. 그러다 며칠 후 미음이 나왔는데 몇 술 드시더니 소화가 안 되는 것 같다며 자꾸만 등을 두들겨 달라고 하셨다. 어머님의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는데 의연하고 당당하던 어머님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활처럼 휘어진 어머님의 등 군데군데에 파편처럼 박혀 있던 50여년의 시린 그리움이 내 손바닥을 타고 흐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절절한 세월의 아픔이 뭉게뭉게 검버섯으로 점령된 그곳의 모습에는 내가 아무리 다가가도 닿을 수 없는 어떤 슬픔 같은 것이 느껴졌다. 마치 세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라는 아픔이 우리 모두의 가슴 저 밑바닥에 생채기로 남아 있듯.
어머님이 병원에 입원하신지 오늘로서 꼭 한 달째다. 일반실로 옮기고서도 면회 사절, 금식이라는 팻말이 붙을 만큼 몇 번의 크고 작은 고비가 있었지만 어머님은 서서히 회복되셨고 지금은 퇴원을 준비하고 계신다. 그동안 암과 싸우느라 앙상하게 말라서 아기처럼 작아져 버린 어머님은 아직까지도 당신 병이 암인 줄 모르고 계신다. 아주 큰 수술을 받고 치료를 했으니 당신 병이 다 나은 걸로 생각하신다.
하지만 어머님이 퇴원하시면 난 더 늦기 전에 어머님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한다. 지난 8월 28일로 예정됐던 제2차 남북 정상 회담이 북한 수해로 인해 잠시 연기되었지만 평화와 공동번영이라는 우리 겨레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 10월 2일부터 2박3일 일정으로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듯이 어머님의 암수술로 잠시 미뤄졌던 금강산 여행을 이제는 다녀오려 한다. 평생 소원이셨던 어머님의 고향 땅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하나인 북녘의 산과 강, 논밭의 모습을 눈에, 가슴에 한가득 담아 드리고 싶다. 그래서 넘칠 듯 출렁이는 그리움의 강에 작은 물꼬가 되어 드리고 싶다. 그리고 조심스레 바래 본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7년의 산고 끝에 열린 제2차 남북 정상 회담에서 했던 약속과 다짐들이 어머님처럼 시공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견디기 힘든 그리움을 고통으로 안고 살아가고 있는 모든 실향민들에게 희망의 물꼬가 되었으면 하고…
<752호 : 2007년 11월 26일 월요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