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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마을예술 최성규

우정과 연대

경산신문 기자 입력 2026.07.22 21:20 수정 2026.07.22 21:20

 
↑↑ 최성규
마을중심공간보물섬 대표
작가
소도시에서 일상의 행복은 “한가함”이나 “편안함”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 행복은 관계의 노동, 관심의 반복, 그리고 서로서로 잊지 않으려는 노력 속에서 자란다. 지역에 바탕을 둔 우정과 연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다. 우리를 둘러싼 동물, 식물, 공간, 시스템같은 비인간적인 것과도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공동의 시간을 살고 있다.
 
우정은 오래된 단어다. 누군가에게 “친구”라고 손을 내미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 말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요즘은 ‘연대’라는 용어를 많이 얘기한다. 우정과 연대는 모두 “함께”를 말하지만, 같은 곳을 가리키진 않는다. 우정은 가까이에서 마음과 삶을 나누는 관계의 감각에 가깝고, 연대는 불편하거나 멀어도 “같은 방향”을 향해 행동을 맞추는 결속에 가깝다. 즉 우정은 “서로를 돌보는 마음과 습관”이라면, 연대는 “서로를 위한 선택과 움직임”이다.

연대가 말이 되려면, 무엇보다 그 연대의 바탕이 되는 감각, 관계의 정직함, 타인을 향한 꾸준한 관심, 그리고 함께 견디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 감각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이름이 바로 ‘우정’이다. 연대는 넓이가 필요하지만, 동시에 깊이가 필요하다. 더 많은 사람과 손을 맞잡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손이 오래도록 따뜻하게 닿아 있을 때 연대는 비로소 신뢰가 된다.
 
우정은 상대의 결을 알아가려는 태도, 즉 상대가 어떤 방식으로 상처받고 어떤 방식으로 회복하는지 이해하려는 자세와도 닿아 있다. 이 점에서 우정은 “좋은 감정”만이 아니다. 때로 우정은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용기, 내 삶의 방식이 상대의 방식과 충돌할 때 조정하려는 인내를 요구한다.

경산과 같은 소도시는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니다. 동물과 식물, 기계와 시설, 오래된 나무의 그림자, 옛 도로와 새로운 길, 신호등, 이곳을 이루는 모든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와 얽혀 있다. 그중에는 스스로 의미를 말하지 못하는 것들도 있다. 말 못 하는 동물,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노후한 설비, 반응을 즉시 보여주지 않는 침묵의 공간들. 이러한 “비인간적인 것”과의 관계는 이성적 ‘이해’보다 공감의 감각이 필요하다. 지역은 배경이 아니라, 내가 먹고 숨 쉬며 길을 걷는 삶의 그물이다. 지역과의 우정은 “정들었다”는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지역의 리듬을 배우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때 우정은 단순한 향수나 낭만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작동하는 책임과 관찰의 미학 즉 “더 자주, 더 섬세하게 보는 눈”을 요구한다.

물건과 공간에 대한 관심은 결과적으로 사람 사이의 온도를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비인간적인 것과의 마음’은 낭만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마음이 있다고 해서 현실이 자동으로 좋아지지는 않는다. 쓰레기를 줄여야 하고, 생태를 지켜야 하고,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그 현실의 과제는 감정 없이 해결하기 어렵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우정이든, 사람과 동물 사이의 관계든, 사람과 지역의 시설 사이의 관계든 우리는 결국 “지속적으로 돌볼 수 있는가”를 배우게 된다.

소도시는 크지 않지만, 하루는 작지 않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버스가 멈춘다. 뉴스는 멀리서 오지만 생활은 가까이에서 굴러간다. 그래서인지 소도시에서 행복을 말할 때는 거창한 문장보다 사소한 풍경이 먼저 떠오른다. 가게 주인이 “어제 괜찮았어?” 하고 묻는 목소리, 시장 바닥에 남은 물기와 발자국, 우편함을 열었을 때 손끝에 닿는 종이의 감촉 같은 것들. 행복은 종종 관계에서 자란다.
 
우정은 사람 사이를 잇는 가느다란 실 같아서, 어느 날 갑자기 끊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정은 거창한 선언보다 훨씬 소박한 순간들로부터 자란다. 같은 하늘을 바라보다가 웃음이 먼저 나고, 별일 없던 날에도 “어떻게 지내?”라고 한 번 더 물어주는 그 작은 습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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