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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을중심공간 보물섬 대표 / 작가 |
우리의 일상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을 들어 뉴스를 확인하거나 SNS를 보며 잠들기 직전까지 우리는 언어와 말을 통해서 개개인의 일상과 사회의 장면을 풍경으로 빚어낸다. 말은 이렇듯 개개인의 일상으로부터 길어 올려지고 보다 확장하여 우리 사회를 합의된 공동체로 엮어준다. 이렇게 만들어진 말의 풍경이 황폐하게 느껴질 때 우리의 일상은 거칠어지고 혐오와 차별, 폭력과 배제의 말이 사회를 점거할 때 현재와 장래는 암담해진다. 반면 말이 순수하고 가치 있고 아름다울 때 우리의 인생도 밝고 희망을 품게 된다.
사전적 의미로 말은 사람이 생각이나 느낌을 목소리로 나타내는 일이며 ‘언어’와 동일시하여 쓰인다. 엄밀하게 언어는 사상·감정을 나타내고 의사를 소통하기 위한, 음성·문자 따위의 수단으로 음성이나 문자의 사회 관습적인 체계를 뜻한다. 즉 말이나 언어를 사용하여 우리는 타인과의 소통은 물론 사회, 공동체 나아가 국가의 중요한 협의를 도출해낸다.
작년 12월 3일 이후 대한민국은 정치적 격변에 시달렸고 불면의 밤을 지새운 시민들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예민한 사람은 이 기간에 말과 언어가 심하게 훼손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는 우리 심연의 바탕을 이루는 사회적 협의의 언어가 훼손된다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가치 있는 단어가 혼란스러워졌고 다시 이런 언어의 의미가 제자리로 되돌아올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상식이 파괴되는 유체 이탈의 화법이 헌법 재판소에서 버젓이 자행되었다. “이번 사건을 보면 실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지시 했니 받았니 이런 얘기들이 마치 호수 위에 떠 있는 달그림자 같은 걸 쫓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라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말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우리가 오염된 언어를 경계하는 이유는 상식을 파괴하고, 상황을 호도하여, 옳고 그름을 혼돈케 하기 때문이다. ‘실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말도 지극히 우리를 파괴하는 오염된 언어이다.
한나 아렌트는 ‘말과 행위의 교환을 통해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라고 믿었다. 이에 비춰 본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세계에 대한 인식과 타인과의 관계 형성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차라리 심각하게 훼손되는 동어반복의 쳇바퀴에 국민을 가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를 가두는 이러한 종류의 말은 ‘말하는 이’의 독단적인 의견을 강제하고 타인과 바깥 세계를 공격하기 위한 무기일 뿐이다. 소위 엘리트로 불리는 이들에 의해서 단어들은 화려한 수식과 끝없이 이어지고 쌓이는 논리로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게 되었다. 너무 많은 왜곡된 말들로 인하여 단어의 의미들이 심하게 오염된 풍경을 낳았다.
사회언어학자 백승주는 2022년 펴낸 그의 저서 <미끄러지는 말들>에서 말들의 존재가, 그리고 이 말들이 서로 자유롭게 섞이고 넘나들 수 있을 때 차이나 결핍, 장애는 배제와 억압의 수단이 아닌 소통을 위한 자원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이렇듯 우리는 한국 사회라는 언어의 서식지에서 혐오와 차별의 말들 아래 숨죽이고 있던 ‘다른 말들’을 찾아내는데 정치인들은 궤변으로 심각하게 언어를 오염시키고 있다. ‘국민 저항권’, ‘국민주권’, ‘민주주의’, ‘공화주의’, ‘입법’과 같은 가치 있던 언어가 제자리를 찾는 것이 가능할까? 그동안 비상계엄의 밤을 겪으며 우리 사회는 너무 비뚤어져 있고 냉소적이고 거칠어졌다. 상식은 무너지고 모든 가치를 가졌던 언어들이 뒤엉켜져 버렸다.
2천년 전 경산시 자인면 북사리 밤나무 아래에서 태어난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의 사상이 귀하게 여겨진다. 그는 당시 귀족층의 불교사상이었던 화엄 사상에 반대하여 쉬운 언어와 말로 불교의 진리를 설파했다. 화려하게 치장된 거추장스러운 말을 걷어내어 순수한 진리의 말을 백성에게 돌려주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오염된 말로 인해 만들어진 풍경이 황폐하다 못해 참혹하다. 말이 오염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원효의 높은 산, 깊은 골짜기 너른 평야 같은 말과 언어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2025년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