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면 평기리 들기공원에 경산의 대표적인 항일운동 현장인 대왕산을 바라보는 항일운동기념탑이 건립됐다. 항일운동기념탑에는 일제 강제징용에 반대해 일어난 남산면 대왕산 죽창 의거 및 신사참배 거부·투쟁 독립운동가 62명의 이름이 새겨졌다.
역사적으로 외침에 항거한 의거는 임진왜란 의병활동과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이 대표적이다. 명청원 등 중국에 의한 침략에 맞선 항중운동은 사대주의 때문인지 크게 부각되지 않고 있는 게 사실이다. 민족 자주성을 지키려는 이런 항일 항중 운동은 우리가 자주독립국임을 대외에 선포하는 아주 중요한 행위이다.
압독국의 후예인 경산은 원효 설총 일연 등 명승 제현을 배출한 고장이다. 고려 마지막 왕비인 순비 노씨, 중방 서씨 문파를 이룬 서사선, 하양 허씨 시조인 허조, 임란 때 창의해 공을 세운 최문병과 박응성, 최철견, 정변함 변호 변문 3형제를 비롯해 3·1운동을 전개한 김용규 목사, 월북한 후 농업상에 올랐던 박문규 등 압독국과 장산현 경산현 하양현 자인현 경산군을 거쳐 오늘의 경산시를 있게 한 수많은 인물이 존재했다.
이 가운데서 특히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과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운동은 그 자체가 목숨을 내놓고 벌인 처절한 싸움이기에 무엇보다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임진왜란은 1592년 부산포를 거쳐 동래성을 함락시킨 왜군이 좌로, 중로, 우로로 나뉘어서 한양으로 진격, 그 가운데 경산은 동래-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로 가는 중로 가운데 위치하여 극심한 환난을 입었다. 당시 경산지역의 의병활동은 누대에 걸쳐 지역에서 기반을 형성한 지식층에 의해 조직된 의병으로 이루어져, 차츰 주변 고을을 지원하는 형태로 확장됐다. 이때 활약한 의병은 경산현에서는 최대기를 비롯한 24명, 하양현에서는 신해, 황경림을 비롯한 12명, 자인현에서는 최문병을 비롯한 43명이며, 이들의 활약상은 여러 문헌에 기록돼 있다. 자인현을 기반으로 의병을 일으킨 최문병의 「성재실기(省齋實記)」가 대표적인 기록으로, 옛 자인지역에 주둔한 왜군과 있었던 소규모 전투상황이 자세히 기술돼 있다. 하양지역 의병장 면와 황경림(黃慶霖, 1561-1623) 선생의 면와실기(勉窩實記, 1872 간행)에서는 경산과 하양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했고 지역 곳곳이 전장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은 하양의 허병률(許秉律) 허동상 의사, 중방동의 전덕수(계성학교 졸업생)는 삼북교회 서성오 목사와 함께 모교 교사인 최상원, 자인면 출신인 최재학도 경산장날인 3월 10일 거사를 준비했다가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는 사실이 독립운동사(1971년)에 기록돼 있다. 대구 시위의 주요인물인 백남채, 김용규 목사, 강대상에 태극기를 숨겨 설교한 이종호 목사도 경산의 애국지사들이다.
지난 2016년 대왕산죽창의거기념행사에 참석했던 애국지사의 부인인 김이조( 당시 101세,) 여사의 손녀는 “할머니가 매일 저녁 미수가루를 치마 속에 감추고 대왕산 정상에 구축한 진지로 찾아가셨다고 들었다”며 “소 풍경소리를 신호로 아버지가 내려와 미수가루를 받아 가셨다”고 회고한 바 있다.
뒤늦은 감은 없지 않지만 항일운동기념탑 건립을 경하해 마지 않는다. 이런 마음들을 모아서 일전에 경산학회 심포지엄에서 제안된 임진창의공원 조성에도 경산시가 즉각 나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경산시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는 근현대 역사까지 아우른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