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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키스탄 사람 아클라크 후세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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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사람 아클라크 후세인은 2000년 5월 14일 스물셋의 청년으로 한국에 왔다. 고향에서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입대해 군 사무실에서 4년간 프로파일러 매니지먼트 일을 했다. 한국에 들어와 성서공단에서 일을 시작했고 프레스 공장에서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비자가 없어 고국에 계신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한국에서 산 세월이 파키스탄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길지만 아직도 그는 미등록 외국인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이웃들에게는 정 많고 일 잘하는 사람일 뿐이다. 막차가 끊겨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 오토바이 뒷자리에 태워주고, 시장 옷가게 마네킹이 넘어져 깨지면 뚝딱 조립해주는. 하나님 알라를 믿는다는 후세인 씨의 복이 이곳에 있는 한 그는 여기 이웃들 속에 있을 것이다. 한국에 오시게 된 계기나 배경이 무엇인가요?동생 내외가 먼저 한국에 와있었는데 당시 한국에 IMF가 터지면서 산업체 상황이 안 좋아져서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그때 나는 군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동생이 그만두고 한국에 가서 돈 벌라고 권했어요. 한국이 살기 좋고 돈 벌기도 좋다고. 그런데 군대를 그만두는 게 쉽지 않아요. 들어갈 때는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데 빠져나오기는 힘들어요. 리퀘스트도 통과해야 하고. 내가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머니가 집에 혼자 계시고 동생도 남의 나라 가 있어서 내가 어머니를 돌봐야 한다고. 그렇게 패널티를 내고 나올 수 있었죠.
파키스탄은 물가가 싸서 군 사무실 월급으로 온 식구가 생활하고 남을 정도였어요. 그렇지만 들어가면 무조건 17년간 일을 해야 하고 일찍 나오려면 패널티를 내야 해요. 병에 걸려도 이 병이 원인이 되어서 군대 일을 할 수 없다는 닥터의 진단이 있어야 하고요. 나도 패널티를 내고 나와서 1, 2년 있다가 산업연수생 신청을 해서 한국에 오게 됐습니다.
한국에 처음 오셨을 때 어디서 어떤 일을 하셨나요? 서울에 이틀 있다가 대구 성서공단에 오토바이 부품 만드는 회사에 들어갔어요. 나보다 먼저 온 파키스탄 사람 몇 명이 일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3년 두 달 정도 일했습니다. 산업연수생 비자가 3년짜리라 두 달은 무비자 미등록으로 일했어요. 그러다가 비자 있는 사람이 들어와서 성서 다른 업체로 옮겼죠. 이후 2003년 10월에 프레스 공장에 들어갔고 한두 달 됐을 때 손을 다쳤어요.
프레스 공장에서 산재로 장애를 갖게 되신 건가요? 처음에 왼손을 다쳐서 사장님이 산재 처리를 해줬어요. 대구 수성구에 현대병원에서 봉합하고 치료받는 중에 회사에서 한 손으로 박스 정리하는 일이라도 하라고 해서 일하다가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또 다쳤어요. 프레스에 눌려서 손톱이 빠져서 또 몇 달 치료받았죠. 그래도 회사는 옮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05년 10월에 다시 사고를 당해서 오른쪽 손가락이 절단됐어요. 휴식시간 3분 전에 목이 말라서 일을 서둘러 마치려다 프레스가 두 번 돌아가면서 기계에 손이 눌린 거죠. 이번엔 손가락이 완전 가루가 돼서 붙일 수가 없었어요.
이걸로 병원 치료를 오래 받았는데 그동안 파키스탄에도 갔다 왔어요. 어머니와 삼촌들, 사촌들이 내 손을 보고 우는데 나는 안 울었어요. 안 죽고 살아 있으니까 울지 말라고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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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서공단에서 일하며 손가락 절단 사고를 당한 후세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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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은 지금 한국에서 같이 살고 있나요? 와이프, 아들, 딸과 같이 살아요. 사고 나기 전 2004년도에 파키스탄 갔다가 결혼식을 했는데 한 달 같이 살고 나만 한국에 들어왔어요. 그러다 사고 나고 재수술할 때 그때 처음 와이프를 한국에 초청했죠. 2007년에. 3개월 비자라서 이후에 무비자로 2년을 같이 살았는데 그때 첫아기 딸을 낳았어요. 와이프가 둘째를 가져서 고국으로 돌아가고 나는 비자가 없으니까 갈 수가 없잖아요. 아들이 다섯 살 됐을 때 2015년에 파키스탄에 가서 얼굴을 처음 봤어요. 10년이나 고향에 못 갔거든요. 2009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때도 못 갔어요. 마지막 그때만 생각하면 진짜 울어요.
한국 정착에 도움을 준 사람이나 기관이 있나요?성서에 이주노동자센터가 있었는데 거기를 다녔어요. 2001년도에 그때 나는 비자가 있었는데 성서공단 근처에서 출입국 일제 단속이 있었어요. 파키스탄 사람 몇 명하고 인도네시아, 몇몇 나라 사람들이 잡혔는데 성서 이주노동자센터 소장님하고 활동가 몇 명이 와서 차 앞에 드러누워서 막아줬어요. 외국인을 도와주는 걸 보고 그때부터 같이 활동하게 됐죠. 20년도 더 됐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도움을 받기도 하고 한국어도 배웠어요. 이제 통역하러 가기도 하면서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경산에 언제 오셨는지, 지금은 어떤 일을 하시나요?경산에는 2010년에 왔어요. 현풍에 있는 회사에서 일할 때 남천면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남천에 무성목재에서 문, 문틀 만드는 일을 13년 했어요. 그리고 삼풍동으로 이사해서 지금은 항주산업에서 하이샷시를 분쇄해서 LG, 또 어디로 리사이클 하는 일을 2년째 하고 있습니다. 먼지가 좀 나지만 위험한 일은 아니에요.
공장 생활에 다른 어려움은 없으세요?
지난 9월 초에 제가 지게차를 운전하는데 다른 사람한테 넘기려고 내리다가 빗길에 미끄러져서 어깨를 다쳤어요. 병원에 갔더니 계속 아프면 3주 뒤에 MRI를 찍어보라고 하는데 진통제를 먹어도 계속 아파요. 경산 이주노동자센터 소개로 대경방사선과에 갔는데 거기 선생님이 센터에서 진료도 하거든요. MRI 비용이 50만 원이 넘는데 그 선생님이 15만 원만 내도 되게 도와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어깨 인대가 나갔는데 큰 병원에서도 의사가 빨리 수술해야 한다고 그냥 두면 어깨나 발이 올라가지 않을 거라고 하네요. 회사에도 얘기했는데 제가 무비자라서 산재가 되면 벌금이 나오고 출입국에 진료비자 받으러 가도 벌금이 나온다고 해서 고민하는 중입니다. 일단 회사에서는 내일 반야월 진병원에 가서 결과를 받아 오라고 하네요.
사고를 여러 번 당했는데 생활에 지장은 없나요?
한 회사에서 세 번 사고 났고요. 와촌에서 일할 때 오토바이 타고 출퇴근했는데 대구가톨릭대학교 앞에서 신호 받고 서 있다가 차에 받혀서 몇 개월 치료받았어요. 2004년에는 성서에서 퇴근하는 길에 앞에 가던 차가 오른쪽으로 갑자기 빠지길래 그냥 달렸는데 바로 앞에 차가 서 있어서 사고가 크게 났어요. 어떻게 병원에 갔는지 의식이 없어서 몰라요. 경대병원 응급실에서 밤새 대수술을 받았어요. 치료비를 제가 다 냈는데 그때는 119를 부를 수 있다는 것도 몰랐고 이주노동자센터가 있다는 것도 치료 끝나고 알았어요. 손가락이 절단되고 일하는 데 불편함은 있어요. 가장 힘든 건 일을 못 하게 됐을 때 다른 일을 찾는 거예요. 손에 익은 일은 그래도 할 수 있지만 새로운 일은 힘드니까.
경산 이주노동자센터에서는 어떤 도움을 받으셨어요?무비자라서 병원에 가면 일반은 너무 비싸고, 저녁에 퇴근하고 오면 병원이 문을 닫아요. 센터가 없으면 진짜 살기 힘들어요. 매주 일요일 의사분들이 돌아가면서 진료해주고 무료로 약을 주거든요. 전에 아르바이트하면서 인대가 나갔는데 괜찮다고 생각하고 오토바이 탈 때 아픈 건 신경 안 썼어요. 그런데 센터 진료할 때 보여주니까 문제 될 것 같다고 부산에 있는 친구 의사분한테 저를 데리고 가주셨어요. 친구분한테 얘기하셔서 수술비가 천만 원이 넘는데 재료비 50만 원 정도만 내고 수술받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했어요. 여기 살기 좋아요. 다치면 도와주는 사람이 있고 봐주는 사람이 있어요. 비자 없는 사람들은 이런 센터가 꼭 필요합니다. 이번에 건강검진 했을 때는 백 명 넘게 왔어요.
무비자 노동자로 살아가는 게 힘들고 두렵지 않으세요?저는 2005년부터 이렇게 지내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얼굴 내보내지 마세요, 내 얘기 쓰지 마세요, 하지만 저는 잡혀가는 것도 추방당하는 것도 무섭지 않아요. 무슬림은 하나님 알라를 믿어요. 내 복은 여기 있어요. 여기 있을 때까지는 먹고 살아야 해요. 여기서 복이 끝나면 안 잡혀도 나는 가야 해요.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살고 있다고.
한국에 완전히 정착할 생각도 있는지? 와이프는 파키스탄에서 대학을 졸업했거든요. 알아보니까 한국으로 가족들을 데려와서 같이 살려면 와이프를 초청해서 대학교에 입학시키는 방법. 유학생 비자를 받으면 된다고 해서 19년에 그렇게 들어왔어요. 영남대 무역과에서 비즈니스 쪽으로 박사과정 밟고 있습니다. 딸은 15살 사동중학교, 아들은 14살인데 경산중학교에 다녀요. 한국에 온 지 2년 됐는데 한국어가 힘들어서 딸내미는 사동고에서 받아줄지 모르겠어요. 자인에 실업계 학교로 갈 수도 있고.
귀화하는 건 애들 엄마가 박사과정 끝내고 결정해야죠. 여기서 선생님이 되거나 일자리를 얻으면 살 수 있거든요. 와이프는 한국사회통합프로그램(KIIP) 5단계까지 했고 딸내미도 4단계 했는데 와이프가 통과하면 나는 자동 귀화가 돼요. 그래서 나는 일해서 돈 벌고 가족들은 그냥 공부에만 집중하라고 해요. 아들은 꿈이 IT 엔지니어, 딸은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꿈이지만 나는 간호사도 좋아요. 하하.
경산에서 일하면서 좋았던 기억이 있나요? 목재 공장에서 일할 때 지금 사장과 알게 됐는데 나중에 같이 일하자 이런 얘기를 했었어요. 그러다 목재 공장에 일이 없어져서 나오게 됐고 지금 사장한테 말하니까 오라고 했어요. 처음에 사장님이 일하는 걸 보더니 후세인, 나는 나가라는 소리 안 할게. 계속 일 열심히 해. 나는 후세인 같은 사람이 내 사업할 때까지 같이 있었으면 해. 그렇게 말했어요.
나쁜 기억도 있어요. 한국 와서 첫 회사인데 친구가 사고를 당해서 우리는 그 일 못 하겠다 하고 한 달 동안 스트라이크 했죠. 사장은 사우디에서 돈 벌어서 회사를 세운 사람이라 외국인한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았는데 밑에 직원들이 나빴어요. 그리고 돈을 220만 원 넘게 떼인 적도 있어요. 직원 열 몇 명 있고 지금도 잘 돌아가는 회사인데 마지막 월급을 안 줬어요. 지금도 전화하면 줄게, 나중에 줄게 하고 안 줘요. 센터에 말해서 받아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안 그랬어요. 거기서 많은 일을 배웠으니까. 그거 가지고 내가 지금 일하는 거예요.
문화나 생활 양식이 달라서 겪는 어려움은 없나요?음식이요. 김포공항에 내려서 센터로 가니까 멀리 식당에서 밥 냄새가 나는데 아, 어떻게 먹지? 첫날 밥에 소금 뿌려서 그것만 먹었어요. 이틀 힘들었어요. 회사에서는 같은 나라 사람끼리 밥을 해 먹으니까 지금은 괜찮죠. 좋아하는 한국 음식도 있어요. 지짐하고 피시 프라이, 생선구이요. 볶음밥도 좋아합니다.
또 무슬림은 남녀가 가까이 있으면 안 되는데 한국에 오니까 남자 여자 팔짱 끼고 다녀서 깜짝 놀랐어요. 그런데 파키스탄하고 같은 것도 있어요. 우리도 엄마를 엄마, 암마라고 부르거든요. 그래서 엄마는 어디 가도 엄마야, 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는 진짜 똑같이 아버지라고 해요.
무슬림인데 종교생활은 어떻게 하세요? 삼풍동 공원 옆 건물 1층에 월세로 기도방을 얻어서 기도하고 있어요. 우즈베키스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인도 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조금씩 보태서 월세를 내는데 여기는 이주노동자보다 학생, 교수들이 많아요. 금요일에 제일 많이 나옵니다. 오후 1시 기도시간에는 70명 정도 있어요. 원래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는데 시간 되는 사람은 와서 기도합니다. 여자들은 자기 집에서 기도하고요.
한국 문화 중에 이해하기 힘든 게 있나요? 한국에서는 집회하기 쉬워요. 우리 파키스탄에 비하면. 여기는 폴리스 프로텍션, 경찰이 폴리스 라인을 만들어서 보호해주잖아요. 파키스탄은 폭력적인 진압이 더 심해지고 있어요. 거기는 군인들이 정부 뒤에 숨어서 조종하고 있어서 군인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해요.
한국에서 살면서 새로 생긴 습관이 있다면?여기는 시간 지키는 거, 약속 지키는 거 대박이에요. 무조건 지켜요. 회사 일하러 갔을 때도 마찬가지고 어디 가도 시간 지키는 게 정말 좋아요. 기차든 뭐든 제시간에 오니까. 파키스탄은 시간 약속에 그렇게 신경을 안 써요.
외국인이 한국에서 일하려면 어떤 걸 조심해야 할까요?법을 지켜야 해요. 나쁜 일 안 해야죠. 어쩔 수 없이 비자 시스템이 그렇게 돼 있어서 불법적인 상태로 있지만,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면 좀 더 일할 수 있을 거예요.
파키스탄에서는 요즘 어느 나라를 가장 가고 싶어 하나요?요즘은 유럽하고 캐나다를 가장 선호하고 그다음이 한국입니다. 일본, 중국은 많이 안 가고 미국도 가기 쉽지 않아요. 지금 사우디나 두바이에 있는 파키스탄 사람들이 한국에 오고 싶어 해요. 일거리가 많고 돈 벌 수 있으니까. 한국에 오는 게 그래서 힘들어졌어요. 오려는 사람이 많으니까 추첨해서 뽑는데 한국말 시험 쳐서 점수 높은 사람, 신체 건강한 사람이 올 수 있어요.
한국이나 경산시가 외국인을 위해 무엇을 더 했으면 하나요? 비자 시스템이 지금은 4년 7개월 두 번 하고 나면 자기 나라로 돌아가야 하니까 이걸 계속 연장해서 살 수 있게 바꿔줬으면 좋겠어요. 예전에 인터뷰했을 때 나의 바람은 비자 없이도 가족과 살고 싶다 였는데 지금 같이 살고 있어요. 더 바라는 게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여기서 가족과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글. 박선영 온마을TV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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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뷰 중인 후세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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