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빛문화유산연구원·경산시가족센터·경산이주노동자센터·온나무·경산신문 공동기획 ⑨
<편집자주>
경산신문은 관내 생활하는 외국인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제안한 (재)한빛문화재연구원(원장 김기봉)과 5월부터 1년 간 외국인 생활상 조사 결과물을 지면에 싣는다. 이번 프로젝트는 경산시가족센터(센터장 정유희)와 경산이주노동자센터(소장 안해영) 등 관련기관이 컨소시움을 구성해 참여한다. 결과물은 단행본으로 엮을 계획이며, 지자체의 외국인 정책 수립에 도움이 되길바란다.
|
 |
|
| ↑↑ 베트남에서 온 부티프엉. |
|
부티프엉은 베트남의 공업도시 하이퐁이 고향이고, 2011년 결혼과 함께 한국으로 왔다. 자신의 생일날 선물처럼 남편을 만나 한국으로 왔고, 딸과 아들 두 자녀와 함께 경산에서 계속 생활하고 있다. 결혼 초기 소통의 어려움으로 한국어를 시작하였고, 아이를 업고 다니면서도 수업을 빠지지 않았던 열혈 수강생이었다. 현재는 대구대학교에 진학하여 한국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며, 졸업과 함께 대학원 진학도 계획하고 있다. 향후 베트남에서 한국어와 함께 모국어인 베트남어를 잘 전달할 수 있는 교수를 꿈꾸는 그녀는 지금도 한국어 공부에 진심이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으며, 한국에 오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베트남에서 2011년에 왔습니다. 한 13~14년 정도 된 것 같아요. 결혼비자로 들어왔어요. 2011년이면 그때 제가 22살 정도였는데 그때 결혼비자로 들어온 거죠. 여기서는 22살이면 결혼하기 빠른 나이지만, 베트남은 그렇지 않았어요. 제가 22살까지 결혼하지 않고 있으니 모두 왜 결혼하지 않느냐 질문이 많았어요.
부티프엉 이름에 담긴 의미가 있을까요? 성이 부이고 티는 여자에게 붙이는 것이고, 이름은 프엉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부씨 성을 가진 여자인 프엉입니다. 이런 의미이죠. 베트남 사람들은 항상 중간에 여자와 남자를 구별해주는 말을 넣습니다. 여자아이면 ‘티’, 남자면 ‘관’ 이렇게 따로 구별해주는 말이 들어가는데, 보통 이름을 듣게 되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게 되는 거죠. 요즘 베트남 신세대들은 ‘티’ 같은 성별을 나타내는 말이 들어가면 촌스러워서 잘 안 쓰고 다른 말을 쓰기도 합니다.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프엉이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합니다.
남편은 어떻게 만났어요?
저희 베트남 고향은 하이퐁이라는 지역이에요. 하이풍은 베트남 북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며, 북부의 대표 항구도시이기도 해요. 꽤 큰 도시이죠. 그곳에서 결혼정보업체 회사를 통해서 남편을 만났어요. 저는 사실 한국 사람과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날 생일이라서 집에 와서 친구들과 놀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런데 갑자기 동네에 아는 언니가 오늘 생일이니 같이 재미있게 놀자고 하면서 어디를 데리고 갔어요. 그곳에서 소개팅을 한 거죠. 남편이랑. 그렇게 만났어요. 그런데 남편을 만나니 좋은 거예요. 그래서 결혼을 생각하게 되었고, 2011년에 한국으로 들어왔죠.
결혼의 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한 4개월 정도 걸렸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남편이 (한국에서) 이리저리 준비를 했어요. 저는 그 동안 베트남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면서 서류를 준비했어요. 사실 그 전까지는 한국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어요. 당시에는 드라마로 한국을 알게 되었는데, 그때 봤던 드라마가 낭랑18세(2004년 KBS2 드라마)였어요. 그 드라마를 좋아해서 많이 봤어요. 그래도 사실 내가 한국에 올 줄은 몰랐죠. 남편이 한국에서 서류를 많이 준비했다고 들었어요. 번역도 필요하고 하니 돈이 많이 들었다고 해요. 그때 문자로 이런 저런 서류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는데 한국어를 모르니 잘 기억나지 않아요. 한 4개월 정도 걸렸나~~ 그렇게 해서 서류 준비되어서 비자 발급되고 한국에 왔습니다.
생일에 남편을 만나서 결혼까지 하게 되셨네요. 어떻게 보면 선물처럼 온 것 같은데, 결혼 후 경산에서 사셨나요? 네 남편의 고향이기도 하고, 여기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들어올 때부터 계속 경산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경산시 진량읍에 황제아파트(창신황제타운)에서 계속 생활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제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이 근처 공장에서 일을 했어요. 제가 첫째 아이 출산한 이후에는 화물차를 구입해서 화물차를 운전하고 있어요.
자녀분은 어떻게 되나요? 2명입니다. 첫째가 딸이고, 둘째가 아들이에요. 첫째는 초등학교 6학년이며, 둘째는 지금 2학년입니다.
경산에서 생활은 어떠셨어요? 사실 많이 답답했어요. 제 고향은 그래도 베트남에서 큰 도시에 속합니다. 시골은 아니거든요. 근데 여기 진량읍은 시골이잖아요. 그때도 친구들이 많이 없어서 너무 답답했어요. 친구도 많이 없지, 가족 특히 시어머니와 친척들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지, 혼자만 있고 하니 많이 답답했죠. 남편을 믿고 왔는데, 남편도 베트남어를 잘 몰라 나는 한국어를 잘 몰라 서로 많이 힘들었어요.
결혼 초기 한국어를 몰라서 힘들지 않으셨어요? 베트남에서 올 때는 3개월 정도 배우고 왔어요. 초보적인 한국어만 배우고 온 것이죠. 거기서도 배운 것이 기억, 니은 정도였어요. 아주 기본적인 한국어만 배웠죠. 한국어를 하나도 모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알파벳 수준으로만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간단하게 읽을 수 있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또 몰랐죠. 그때도 남편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사전 찾아야 했어요. 그러다보니 싸우기도 많이 싸웠어요. 하고 싶은 말을 다 전달하지 못하고, 또 그렇게 하다 보니 오해도 많이 생기고 해서 싸우기도 많이 싸웠어요.
결혼 초기 의사소통이 힘들어 싸웠던 이야기가 있다면? 신혼 때 남편이 밥을 먹자고 했어요. 근데 저는 배가 불러서 밥을 먹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밥 안 먹겠다고 했는데, 남편은 그냥 밥을 먹자고 하는 거죠. 왠지 억지로 먹자고 강요하는 것 같아서 전 또 안 먹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남편이 좀 큰 소리를 낸 거예요.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때 저에게 짜증을 낸 거죠. 저도 짜증을 내면서 베트남어로 큰 소리를 냈고, 남편도 한국어로 좀 심한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억나요.
언어 문제로 또 다르게 힘들었던 점은 없나요? 결혼하고 아마 첫 명절로 기억해요. 추석이었던 것으로 생각해요. 그때는 한국어를 거의 이해하지 못할 때였어요. 특히 사투리는... 시댁에 갔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데 그렇게 친척들이 다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데, 계속 저를 보면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왠지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아무도 나에게 이야기를 안 해주는 거죠. 아니 못해주는 거죠. 나한테 뭐라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시지만 못 하고, 저도 그 내용이 궁금한데 이야기를 알지 못하고. 정말 답답했어요.
당시 그런 상황 때문에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신 것인가요? 한국에 와서 얼마 되지 않아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 가서 신청하고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때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경산에만 있었어요. 그 공부하다가 첫째 임신되었는데, 그래도 계속 다녔죠. 그러다가 첫째 태어난 뒤로는 집에 좀 있었어요. 첫째 애 태어났을 때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자녀 양육 방문 선생님이 방문하셔서 돌봄을 같이 해주셨어요. 3~4개월 정도 집에서 있다가 그때 수녀님을 알게 되었어요. 베트남인 수녀님이신데 그 분이 한국어를 가르쳐주신다고 해요.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 있는 언니가 그곳도 다니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곳에 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삼주아파트 부근이에요.
가족과의 소통 이외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한 이유가 있나요? 처음에는 너무 답답해서 시작했는데, 다음에는 돈을 벌고 싶어서 했어요. 베트남에서는 고등학교 졸업 후 한 번도 쉬었던 적이 없어요. 열심히 일을 했죠. 그런데 여기서 가만히 있으려고 하니 힘든 거예요. 남편한테 돈 벌고 싶다고 하니 한국말 모르고 일 나가면 일은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이 힘들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또 사람들이 일 못하면 무시하고, 욕하고 그렇게 되면 일도 오래 하지 못할 것이다 말을 했어요. 남편이 일단 한국어 먼저 배우라고 해서 열심히 했어요.
지금은 대구대학교 한국어교육 전공 3학년에 재학 중인 것으로 들었는데? 네. 내년에 졸업이에요.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3급 공부하고 4급에 들어갔어요. 1년 동안 4급을 공부했어요. 둘째를 업고 다니면서 공부했어요. 그런데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는 5급과 6급 과정이 없습니다. 사회통합프로그램이라 4급까지만 있죠. 그래서 대학에 지원하게 된 것이죠.
이중언어 강사는 어떻게 시작하시게 된 것이죠? 다문화가족지원선터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그곳 선생님께서 이중언어 강사 이야기를 하셨어요. 저보고 한국말도 잘하시니 이중언어 강사를 하면 어떻겠느냐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그때 둘째 아들 (등에) 업고 수업 다녔는데 결석이 없어서 개근상도 받았어요. 그래서 이곳에서 추천하고, 교육을 받고 수료증을 받았어요. 이중언어 강사는 활동하면서 2년마다 4번 보수교육을 받고 평가를 받습니다. 2019년부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어린이집과 학교 등에 이중언어 강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국적을 취득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름을 안 바꾼 이유가 있을까요? 보통 국적을 취득하면 여자들의 경우 이름을 바꾼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이름을 바꾸고 싶지 않았어요. 제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싶었죠. 엄마 아빠가 해 줬던 이름이라. 보통 이름을 바꾸는 이유는 한국 이름으로 바꾸면 애들이 학교에서 엄마 이름이 한국 이름으로 나오기 때문에 차별을 안 받는다는 거예요. 제 생각에는 이름만 바꾼다고 해서 차별을 안 받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이 들어요. 이름만 가지고 있고 한국말도 모르면 그 사람은 한국 사람이 아니잖아요. 한국어로 대화도 못하는데 그래서 저는 바꾸고 싶지 않아서 안했어요. 아이들에게도 물었어요. 혹시 엄마 이름 바꿔야 될까 물었더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안 바꿨죠.
앞으로의 꿈은? 남편과 싸울 때도 한국어를 잘했으면 해요(웃음). 지금은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싸울 때는 (한국어가) 잘 안 나와요. 목표는 대학교를 다니다 보니 대학원도 다니고 싶어요. 그래서 한국어 강사가 아닌 교수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어 교수하는 외국인 교수를 보니 부러워요. 여기서 열심히 해서 베트남으로 가서 한국어 교수를 하고 싶어요.
<여수경 한빛문화유산연구원 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