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최성규 미술중심공간보물섬대표, 작가. |
‘코나’로 불렸던 고양이가 있었다. 서상동 우체국 옆 보물섬의 뒷마당 주차장에 살았었다. 지금 ‘코나’는 이곳에 없다.
억수같이 비가 오던 어느 여름날 밤, 아기 고양이의 절박한 울음 소리를 들었다. 보물섬 뒷문 건너편의 빈 집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차 밑에서 어린 고양이 한 마리가 울고 있었다. 엄마 고양이가 어린 새끼들을 떼어 놓은 것 같았다.
작은 그릇에 물과 사료를 담아 가져다주니 잘 먹었다. 하지만 어미에게 교육을 제대로 받았는지 사람의 손은 무척이나 경계하고 거부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사료를 먹고 나서 보물섬 옆 길냥이들의 급식소 쪽으로 오더니 어디론가 숨었다. 그 이후로 그 아기 고양이는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다.
아기 고양이가 보물섬 뒤편 마당으로 오기 전 ‘미야옹’이라고 부르던 덩치 큰 수컷 고양이와 ‘프랑’이라는 암컷 고양이가 보물섬의 ‘마당냥’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마당냥’이란 길냥이와 집냥이의 중간쯤으로 사람이 집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료와 물을 제공하고 가끔 돌보기도 하는 고양이도 자유롭게 동네의 이곳저곳을 다니는 사람과 일정한 거리를 둔 그런 고양이들을 일컫는다고 한다. 나는 세 마리의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였고 어린 고양이를 ‘코나’라고 이름 붙였다.
전 세계가 코로나19 이후로 ‘메타버스’의 열풍에 휩쓸리고 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디지털 사회인 것은 피할 수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인공지능과 코딩교육은 교육에 있어서 필수기술이 되었으며 2년 후부터는 초등학교의 정식교육 과정에 포함된다고 한다.
하지만 기술을 배우는 모든 학생은 먼저 인문학적 소양을 가지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흔히 인공지능 로봇이 인류를 지배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지만 이 문제는 기계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인문학적인 고민을 하게 된다면 극복할 수 있다. 기계를 다루고 결정하는 사람들이 기계의 특성과 인문학적인 배려를 충분히 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에 적용이 된다면 이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영하 20도의 혹한 속에 찬 바람이 불어오자 부들부들 떨던 고슴도치들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모이다 보니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조금 더 따뜻해지기 위해서 더 가까이 다가가자 가시가 몸을 찌른다. 간혹 고슴도치들이 자기 자리를 더 많이 차지하려고 가시를 세우기도 했다. 고슴도치들은 아파서 흩어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흩어지면 다시 춥다. 추워서 부들부들 떨다가 견딜 수 없어 다시 몰려들기 시작한다.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고 너무 가까우면 상처 받고 너무 떨어지면 추위를 타는 고슴도치의 딜레마는 독일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가 쓴 우화에 등장한다. 외로움을 타는 계절이면 홀로 행동하는 고슴도치도 서로를 찾는다.
아기 고양이 ‘코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어느 날 임시로 지어준 겨울 집에서 싸늘한 몸으로 발견되었다. 어떻게 손을 써볼 수도 없었다. 어린 고양이 ‘코나’와의 거리가 있었던 짧은 기억을 생각하며 인문, 인성과 지속가능한 공존, 생명에의 존중을 융합한 ‘돌봄’의 코딩을 상상해 본다.
길냥이들에게 사료와 깨끗한 물을 제공할 수 있는 장치나 추운 겨울날을 보낼 수 있는 겨울 집과 얼지 않는 급수대를 코딩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의 좋은 직업을 위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는 코딩교육이 아니라 ‘돌봄의 코딩’이 학생들에게 교육이 된다면 ‘공존의’ 인성을 기를 수 있으며 과학과 ‘나’와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매서운 겨울날이 계속되고 있다. 길에 사는 생명들은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기 고양이 ‘코나’는 평소 뛰어 놀았던 보물섬 뒤편 공터의 양지 바른 곳에 묻혀 있다. 주변에 사는 길냥이 여러 마리가 햇볕이 드는 낮이면 ‘코나’가 묻힌 양지바른 곳에서 몸을 녹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