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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양지리 1호 나무널무덤 못 다한 이야기 4편

경산신문 기자 입력 2022.11.17 11:37 수정 2022.11.17 15:37


 
(재)한빛문화재연구원-경산신문 MOU             지역연구자료공유 기획연재 (23)

이번은 지난 5월에 열린 경산시립박물관 학술대회 “양지리유적을 통해 본 경산지역 목관묘 축조양상과 특징”이라는 제목의 발표에서 제기했던 질문에 답하는 시간을 가져보겠다.
 
1. 오수전 장식 과초집 안에 들어 있었던 과(戈)는 철과인가 동과인가?
발표자의 지적처럼 철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이에 대해 보고서의 유물 설명에서는 동과로 기술했으나, 맺음말에서는 “오수전 장식 과초집”라 하여 혼선을 초래했다. 오수전 장식 과초집 안에 들어있던 ‘과’는 과집에 들러붙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분석을 진행할 수 없었다.(사진 1) 따라서 X-선 투과사진을 참고해서 소재를 추정할 수밖에 없는데, 그 특징으로 볼 때 동(銅)보다는 철(鐵)로 추정하는 것이 옳겠다.
 
↑↑ △사진 1. 오수전 장식 과초집 X-선 투과사진.

2. 철도끼를 묘광 모서리와 정지면에 깔거나 세워둔 것은 시대(屍臺)로 파악하여야 하지 않나?
일반적으로 시대란 주검을 놓기 위해 만든 높고 편평한 시설을 뜻한다. 양지리 1호 나무널무덤의 경우 관 아래 정지면에 철도끼를 3열로 깔고, 그 위에 깔개(초본류)를 깐 다음 광의 벽면에는 철도끼를 기대어 뒀다. 관을 안치한 다음에도 관 바닥에 5열로 철도끼를 깔고, 관의 벽면에는 철도끼를 기대어 뒀으며 시신을 안치하기 전에 깔개를 한 번 더 깔았다. 

이 유구에서는 청동거울 3점, 청동검과 철검 4점, 칠기부채 3점, 오수전 장식 과초집 등을 통해 피장자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가 표현되었다. 따라서 철도끼를 무덤 여기저기에 깔고 벽면에 세우는 방식은 최고 지배자가 추구할 수 있었던 매장의례의 한 절차로 판단되며, 관련 연구자의 지적처럼 철도끼의 배치를 통해 피장자의 경제력을 표현하고자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시대(屍臺)의 개념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
 
3. 구유형 목관 하부에 관상(정지한 점토층)이 설치되지 않았을까?
구유형 목관을 제거한 다음의 조사 과정을 잘 상기해 보면 유기물(구유형 관재)을 걷어내자 바로 정지면이 노출됐기 때문에 관상으로 볼 만한 토층은 발견되지 않았다. 요갱부가 바닥으로 내려앉으면서 관 내부도 그 위치에서 바닥부가 내려앉은 정황도 관상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정황이라 하겠다.(사진 4) 

↑↑ △사진 4. 목관 바닥 조사 중 전경(요갱부로 바닥 관재가 내려앉은 위치.

또한 관 내부에 부장했던 검파두식(검 부속구) 1점이 관 아래로 내려앉아 요갱부 상면에서 노출됐다는 점도 이를 증명하는 사실일 것이다. 만약 관상 시설(점토층)이 있었다면 관 내부 유물이 요갱부 정지면까지 내려앉을 수 없기 때문이다.

4. 이중격벽설은 타당한가?
필자는 보고서에서 목관의 동단벽측 구조에 대하여 목관 막음용 판재와 칸막이용 판재를 놓은 구조로 설명한 바 있다. 이에 대해 발표자는 안쪽 격벽으로 추정된 부위가 마감재이고, 외측 판재는 동단벽 전체를 막았던 판재가 아니라 별도의 기능을 지닌 흔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다. 수종이 소나무와 상수리나무로 차이가 있다는 점도 그러한 추정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한다.
 
동편부의 외측 판재는 관 전체를 막았던 것이 아니라 별도의 기능을 지닌 것으로 본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겠다. 하지만 관의 구조로서 완성도를 상상해 볼 때 이에서 좀 괴리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서단벽부의 마감재도 흔적이 없지만, 그 존재를 상정해야 하듯이 동단벽부 마감재 역시도 일부만 남아있지만 이를 마감재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다호리 15호 판상칠기의 경우는 특별한 기능을 상상할 정도의 형태를 갖춘 칠기였지만, 양지리의 경우는 양상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유사한 성격으로 보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발표자는 목관에 뚜껑 시설이 없다고 생각하여서 이와 같은 의문을 제기한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5. 목관에 뚜껑이 있었는가?
발표자는 유구 단면 토층에서 묘광 덮개와 구유형 목관 사이에 관 뚜껑의 존재를 상정할 만한 뚜렷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또, 이 유구에서 목관의 흔적이나 묘광의 덮개 흔적은 명확한데 비해 유독 목관 뚜껑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다소 의아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애초에 목관에 뚜껑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발굴조사 당시의 정황으로 돌아가 보건데 목관의 뚜껑으로 판단되는 유기물층을 걷어낸 다음 관 내부에 부장됐던 유물이 노출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사진 2) 그 유기물은 목질의 방향이 동서로 향해 있고, 부분적으로 목질이 겹쳐져 있는 양상도 확인됐다. 

↑↑ △사진 2. 목관 뚜껑 노출 세부.

이를 통해 목관의 뚜껑은 여러 장의 판재를 길이방향으로 걸쳐 둔 것이라 복원했다. 결정적으로 남장벽부에 기대뒀던 철도끼 한 점의 출토 정황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발굴조사 당시 운구를 위해 구유형 목관에 박아둔 것은 아닐까라고 잠시 설명됐던 철도끼다.(사진 3) 이 정황을 밝히기 위해 철도끼 주변의 관재를 통으로 잘라 분석을 진행했다. 

↑↑ △사진 3. 철부 윗면 목관 뚜껑 노출 상태.

이 때 철도끼의 윗면을 덮고 있던 목질이 목관의 뚜껑이라 판단하고 있다. 이 유물은 목관재가 부착된 상태로 보존 처리돼 경산시립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김동숙 성림문화재연구원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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