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빛문화재연구원-경산신문 MOU 지역연구자료공유 기획연재 (22)
본격적으로 양지리 1호 나무널무덤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지난 5월 경산시립박물관은 “경산지역 청동기~원삼국시대 문화 전개양상”이라는 제목의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경산 양지리유적 보고서의 내용을 토대로 한 조사성과 발표에 이어 목관묘의 축조 양상, 동검의 제작기술, 옻칠에 관한 세부 주제 발표가 있었다. 오늘은 발굴조사 성과에 대한 지정토론에 대해 답변을 조금 더 추가하는 시간을 가져보겠다.
첫 번째는 양지리 나무널무덤의 축조가 자연지리적 입지 환경과 관련된 것인지, 금호강 주변의 여타 목관묘의 축조 입지와 차별화될 수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금호강 수계를 따라 확인되는 나무널무덤은 대부분 구릉 사면이나 말단부에 입지하는 반면 양지리의 경우는 충적대지의 선단부에 입지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두 번째는 축조공정에 따른 제사의 의미와 출토된 인골에 대한 분석 결과를 묻는 질문이다. 축조공정에 따른 제사는 크게 3단계 즉, 정지면 요갱부, 목관 내부, 봉토부로 나누어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정지면에서의 제사는 요갱부에서 동검과 동모, 중국 동전을 장식한 꺾창집과 꺾창 등의 희귀한 수입품과 물품을 바구니에 담아 부장했다. 요갱부 제사는 목관묘 자료에서 많이 확인되는 양상으로 이에 대해서는 지신에 대한 공헌적 의미로 이해된다. 중국 동전을 장식한 꺾창집은 지금까지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전체에서 유사 예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이의 제작지와 유입 루트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과제일 것이다.
다음으로 목관 내부 제사는 충전토 위에서 이뤄졌다. 이는 피장자에 대한 공헌 제사로 이해되며 유물로는 뿔달린항아리, 항아리, 주머니호가 각 한 점씩 부장됐다. 특이한 점은 항아리 안에 봉숭아씨, 참외, 숭어뼈와 같은 음식물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과일의 종류로 볼 때 장례가 이루어진 계절이 여름일 가능성도 짐작된다.
항아리 안에서 음식물과 함께 칠기용기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제사음식은 제기(祭器) 위에 올려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원삼국시대 목관묘에서 음식물이 확인된 예는 창원 다호리유적이 있다. 다호리 1호 나무널무덤에서는 정지면에 과실과 같은 제물을 제기에 담아 묘광 바닥에 놓고, 밤은 바닥에 뿌린 것으로 알려져 있어 양지리의 경우와는 차이를 보인다.
봉토부 제사 유물로는 항아리와 단지 2점이 있다. 단지는 조사 당시 1개체가 파손된 것으로 판단하고 수습했다. 하지만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태토와 구연부 형태에서 미세한 차이가 있음을 확인하고 두 개체로 나눴다. 특이하게도 단지 두 점은 모두 세로 방향으로 깨어서 봉토 안에 넣어 두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유추하는 데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 다만 출토 지점을 근거로 매납의 프로세스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해에 덧붙이고자 한다.
이 공헌용 토기는 피장자를 안치하고 나무뚜껑을 덮은 뒤, 묘광의 어깨선에 또 다시 나무덮개를 걸친 다음 봉토를 일정 부분 조성하는 과정에서 함께 묻었다. 이 과정은 피장자와 마지막 작별이 이루어진 시점이다. 무덤 주인공이 현세에서 누렸던 모든 권위와 위엄을 내려놓고 조상의 범위로 진입하는 단계로 볼 수 있어서 조상제사의 의미로 상정해 보고자 한다.
인골은 노출 당시에 피장자의 왼손 손가락뼈의 마디마디를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흙에 흔적이 남았는데, 팔목에 팔찌를 꼈던 것도 알 수 있었다. 또, 머리뼈는 제 위치에서 왼쪽으로 조금 이탈된 상태였지만 원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인골의 분석은 미토콘드리아 DNA분석·조직분석·안정동위원소 분석을 진행했으나, 시료의 상태가 불량하여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할 수 없었다. 다만 신장 170㎝에 가까운 20대의 성년남성임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세 번째는 1호와 2호 나무널무덤의 상관관계, 계층 차이, 유물 부장양상의 차이를 묻는 질문이다.
먼저 2호 나무널무덤은 이단으로 광을 파고 나무덮개 위에 돌을 쌓은 구조다. 이와 같은 무덤 형식은 청동기시대부터 내려오는 재지적 요소라는 점에서 피장자를 재지집단의 유력자로 상정해 볼 수 있겠다.
이와는 달리 1호 나무널무덤의 구조는 구유형 관에 뚜껑을 판재로 여러 매 덮은 구조고, 출토유물은 선진지의 수입품이 많다. 두 유구 모두 이 일대의 유력자 무덤임에는 분명하지만, 출토 토기로 볼 때 시기 차가 100년 이상 나기 때문에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또한 최고 유력자의 지위가 혈족 관계로 승계되었을 가능성은 없으며, 두 주인공은 모두 양지리 일대에 터전을 둔 정치체의 최고 유력자임이 분명하다. 1호 나무널무덤 축조 시기에 즈음해서 최고 지배자의 무덤에 부장되는 유물의 종류가 다양한 수입품으로 교체되는 부장 풍습의 변화를 겪었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또, 양지리 집단은 임당 일대의 목관묘 집단 보다 더 이른 시기의 중심 세력이었을 가능성도 상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양지리 일대에서 관련된 자료가 좀 더 보충된다면 구체적인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다음의 마지막 기사에서는 “양지리유적을 통해 본 경산지역 목관묘 축조양상과 특징”을 주제로 한 발표에서 제기되었던 몇 가지 질의사항에 대하여 답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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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1. 경산 양지리유적 1호 나무널무덤 3D 정사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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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2. 경산 양지리유적 1호 나무널무덤 정지면 노출 상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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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동숙 성림문화재연구원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