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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성규 미술중심공간보물섬대표, 작가. |
참담하다. 2022년 10월 29일 대한민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누구는 ‘사고’라고 말하고 누구는 ‘참사’라고 한다.
두 단어의 의미가 사뭇 다르겠지만 자금은 150명이 넘는 젊은이들의 죽음 앞에서 그저 슬픔과 안타까움을 가진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자신의 의지대로 걷지 못하고 좁은 골목으로 내몰렸을 젊은이들과 그들의 무서웠을 공포의 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선진국에 진입했다며, K 문화를 자랑하며, 국격을 운운하던 자랑스러움과 포부가 일순간에 무너졌다. 슬픔을 넘어서 조금씩 찾아오는 분노는 희생양을 찾으려고 한다. 너무 분하고 화가 나지만 그렇다고 분풀이를 위해서 희생양을 찾고 두들겨 패는 일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어떤 이는 서양의 귀신축제에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왜 몰상식하게 빠져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핼러윈은 10년 전부터 우리나라에 정착한 문화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10년 전 핼러윈이 되면 귀신 복장,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한 꼬마들이 어린이집으로 향하던 그들이 지금의 20대이다. 그러므로 핼러윈은 젊은 세대에게는 추억이며 성인이 되어서는 또 다른 기억에 많이 남는 즐거운 축제임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어처구니없는 죽음 앞에서 어떤 이들은 세월호의 공포를 느끼며 또 이 참담한 일을 두고 이용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왜 유족들에게 장례 금액을 지원하느냐고 투덜거리고, 어떤 이들은 음모를 믿기까지 한다. 음모론은 벌써 유튜브를 통해서 조금씩 퍼지고 있다.
11월 5일까지 국가적인 애도의 기간이라고 하지만 ‘추모’와 ‘애도’에만 초점을 맞추기에 사건의 참상이 너무 크다. 11월 5일 이후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사회가 나아갈 수 있을까? ‘뒤로, 뒤로’가 ‘밀어, 밀어’로 들릴 수 있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하고,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큰 음악 소리를 생각하며 거리를 완전히 장악해 버린 이 시대 상업주의 문화를, 개인의 혼을 송두리째 잡아먹는 강력한 비트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를, 최소한 그 밤의 문화에 강력한 비트는 어떤 의미였는지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린 시절 귀신분장을 하고 유치원에 가던 동심의 축제가 술에 취해 CPR을 시행하던 구급대 옆에서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는 일그러진 얼굴을 가진 우리 시대의 자화상도 괴롭다. 마음대로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사람을 밀쳐서 강제라도 ‘나’는 나가야겠다는, 앞의 사정이야 어떻든 나는 지금 하고 싶은 것만 한다는 극도의 이기주의와 폭력적 사고를 깊이 반성해야 한다.
참상으로 희생된 젊은이들을 생각하며 애도와 추모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조용히 ‘추모’만 하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이 아닐까? 좁은 골목에 갇혀 이리도 저리도 가지 못하고 떠밀리며 사는 우리들은 어떻게 ‘그곳’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모였고, 그 많은 사람의 행렬에 국가와 지자체는 아무런 방향도 제시하지 못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아무리 소리쳐도 군중의 목소리에 묻혀 버리고 아무리 애원해도 오해받을 수밖에 없는 야만적인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한다. 서울의 어느 구청장에 의해서 지난달 29일 이태원에서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축제는 축제가 아니라 ‘현상’이 돼버렸다. ‘사람들이 죽을 것 같다’, ‘압사당할 것 같다’라는 그날 오후 6시 30분 112의 신고를 다만 ‘현상’이기에 가볍게 여긴 경찰관의 가벼움으로 넘기기에는 죽음의 크기가 너무 크다.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이야기하는 것을 귀찮아하거나 언짢아하지 않아야 한다. 많이 이야기하고 많이 미안해하고 많이 살펴보고 많이 슬퍼해야 한다. 어떤 사건의 범죄자를 찾는 것처럼 원인 제공자를 찾는 일은 지금의 슬픔을 ‘마녀사냥’으로 무마하려는 무서운 바이러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