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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영호 한국인문학진흥원 부원,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인문학박사. |
경산을 언급할 때 금호강을 빼놓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많지만 두 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역사적인 면과 지리적인 면을 들 수 있다.
금호강은 역사적으로 경산에 사람이 집단을 이루어 살게 된 원동력이 된 하천이다. 경산에 최초로 나타난 국가인 압량국(압독국)도 금호강이 없었다면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임당동 고분군이나 조영동 고분군이 금호강 가까이 있고, 소국의 기반이 된 족장사회의 지석묘도 금호강의 지천인 오목천과 남천 유역에 많이 분포한다.
또한 하양 양지리의 이른 시기 소국의 고분들도 금호강에서 멀지 않다. 한편 지리적으로 금호강은 경산을 중심으로 금호평야라는 경북 제일의 충적평야를 빚어놓았다. 금호평야는 영천에서 대구까지 펼쳐져 있지만 중심은 경산이고 곡식과 과수의 주요 공급지이다.
금호강을 말하기 위해 서두가 길어진 셈이기는 하나 낙동강에 비해 평가절하된 사정을 생각하면 장황할지라도 더 많은 설명이 필요한 강이 금호강이다. 특히 경북을 언급하고 경산을 떠올릴 때 금호강은 지역 사람들이라도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 금호강은 오직 경북에서만 흐르고 그 중심에 경산이 있기 때문이다.
금호강은 낙동강이 남북으로 경북을 적시는 데 비해 동서로 산이 많은 경북에 비옥한 땅을 만들어놓았다. 그래서 낙동강 못지않게 선사시대부터 연안에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살았다. 범람지역이 넓은 낙동강은 농경사회 형성 이전에는 오히려 연안에 사람이 살기 위험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영남분지 중 중부분지를 중심으로 수로가 형성된 금호강은 구릉지가 많고 하안단구가 발달하여 일찍이 많은 사람들이 정착했을 듯도 하다. 그래서인지 금호강은 남부지역의 강 연안 중에서 유일하게 청동기시대 유물이 집중적으로 나오는 강이기도 하다.
또한 지천을 포함해 금호강에 가까운 구릉에는 여지없이 지석묘가 발견되기도 한다. 후대에 와서도 골짜기마다 수많은 자연마을이 자리 잡기도 했으니 이는 경산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자연히 물류가 필요하게 되는데 금호강은 여기에도 일조하게 된다. 이는 삼국시대부터 경산을 중심으로 한 물자 이동이 금호강을 통해 이루어진 데서 알 수 있다. 한 장군놀이와 연결되어 있는 자인팔광대도 이러한 환경에서 그 원형이 만들어졌다고 추정된다.
이렇게 보면 ‘경산(慶山)’이란 이름이 경사스러운 일이 많다는 뜻에서 나왔다는 설명도 금호강과 무관치 않음을 알 수 있다. 고대~중세사회의 경사스러운 일에는 물산이 풍부하고 정주 환경이 좋기 때문에 생긴 일이 대부분일 것이다.
한편 하양에서 금호강은 남천으로도 불렸다. ‘남천’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적 공간으로 여겨져 생긴 이름이다. ‘하양(河陽)’은 물(금호강)의 북쪽이라는 의미이고 남쪽의 금호강은 남천이다.
경산은 이처럼 금호강과 관련이 깊다. 포항 죽장면 가사리에서 발원한 금호강이 ‘금호강’이라는 이름을 얻은 곳은 영천이다. 그래서 자호천이 고촌천과 합류한 후 영천시를 관류하는 지점부터 금호강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또한 ‘금호(琴湖)’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곳은 「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에 영천의 서쪽 약 6km 지점이라고 나온다.
여기서 언급된 갈대가 바람에 비파 소리를 내는 호수(琴湖)처럼 넓은 곳은, 금호강이 영천에서 남류하다가 하양을 향해 서류하는 금호읍 부근이다. 강폭이 넓고 유속이 느린 강변에 형성된 습지에 자라는 갈대의 생태와도 어긋나지 않는 곳이다.
금호강에서 영천이 차지하는 비중이 이렇듯 작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경산은 더 금호강과 가까운 지역이다. 앞으로 이를 더 따져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