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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연구자료공유 기획연재 (20)] 내 생애 두 번째 선물! 경산 양지리 1호 나무널무덤

경산신문 기자 입력 2022.10.06 15:34 수정 2022.11.03 15:28

 

(재)한빛문화재연구원-경산신문 MOU              지역연구자료공유 기획연재 (20)

다가오는 2022년 11월 16일은 경산 양지리 1호 나무널무덤이 이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세상에 드러난 지 5년이 되는 날이다. 

양지리 1호의 발견은 다호리 1호 통나무널무덤의 발굴조사 후 약 30년의 시간이 흘러 이에 견줄 만한 유적을 조사한 셈이니 매우 큰 뉴스였다. 두 유적 모두 실체가 분명하지 않았던 고대 국가 형성기의 사회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학사적 의미는 엄청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고고학을 전공한 개인적 경험에서 잊을 수 없는 선물을 꼽자면 망설임 없이 나는 “경산 양지리 1호 나무널무덤”을 손꼽는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다 순서가 있는 법이라 첫 번째 기억을 간과할 수 없기에 양지리를 다루기 전에 한 번 들추어 내고자 한다. 그것은 풋풋한 20대의 기억으로 남아있는 “의성 학미리 1호 돌방무덤”의 발굴 경험이다.

↑↑ 사진 1. 의성 학미리 1호 돌방무덤.

학미리 1호분은 의성지역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삼국시대의 돌방무덤인데 내가 대학원을 수료하고 발굴 현장의 팀장이라는 중책을 처음 맡았기에 전전긍긍하며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의 무지로 유구의 중요한 정보를 없애버리는 것은 아닌지, 어디에 토층과 피트를 두어야 할지 등등으로 하루하루 고민하던 시간도 모두 지나고 조사는 어느새 막바지에 이르러 돌방 내부를 복토하는 일만 남겨두고 있었다.
 
이 유적은 정비 복원을 목적으로 한 조사였기에 내부 조사가 끝이 나면 돌방의 안을 모래주머니로 채운다는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분 발굴현장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조사 마무리 단계에서 屍臺(시대: 시신이나 관을 올려두는 돌 구조물)를 해체하면 한두 점의 유물이 돌 틈 사이에 빠져있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정비복원을 목적으로 했다고는 하지만 시대를 해체하지 않는 것이 찜찜한 일로 기억될 거 같았다. 그저 해체 후에 돌을 제자리에 그대로 놓아두면 되겠지라고 간단하게 생각하고 돌을 들어내 보기로 했다. 일은 그렇게 찰나의 선택으로 시작됐다.

돌 틈 사이에 흘러내린 손칼이나 귀걸이 한 점 정도를 기대하며 해체를 시작하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엄청난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3차 관대(시신이나 목관을 올려두기 위해 돌로 만든 시설)로 사용한 돌을 모두 들어내자 바닥에서 돌이 가득 들어있는 손잡이 달린 철제 솥이 뒤집혀진 상태로 놓여져 있었다.

1차 관대를 들어내는 과정에서는 은으로 장식한 큰칼 한 점이 돌 틈 사이에서 발견됐고, 무게 1.5kg에 육박하는 묵직한 청동방울 3점이 돌방의 동쪽 벽면에 기대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돌방 바닥에서는 관대를 설치하기 전에 바닥에 불을 피워 제사를 지낸 흔적도 확인됐다.
 
 
↑↑ 사진 2. 의성 학미리 1호분 관대 바닥 출토유물.
돌방 안에서 무덤을 축조하는 과정 속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며칠간 지속되면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학미리 1호분에서는 봉분 밖에도 돌 제단시설과 기대를 이용한 제사의 흔적이 여기저기서 발견됐다.
 
나는 이 발굴 경험을 토대로 삼국시대 무덤의 장송의례 연구를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사람 속 마음만큼이나 알 수 없는 것이 땅 속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자신의 편협한 경험으로 조사의 방향을 예단하는 일은 옳지 않다는 큰 교훈을 얻었던 현장이었다. 

고민의 수준과 정도에 비례해서 조사 성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기에, 고민의 시간이 허락되던 시절에 발굴을 경험했던 그때의 나는 정말 행복한 연구자였다. 양지리유적 발굴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굳이 25년 전의 개인적 경험을 들추는 이유는 당시의 발굴 상황과 나의 열정이 너무 그립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의 선물은 그로부터 약 20년이 흘러 2017년 가을 경산 양지리 1호 나무널무덤과의 만남이다. 그 해 가을은 한중일 국제 학술대회를 포함하여 3개의 학술대회를 우리 연구원에서 주관하고 있던 터라 여러 가지 준비로 하루하루를 분주하게 보내고 있었다. 현장팀장으로부터 처음 나무널무덤이 나왔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그저 목관재의 흔적 정도가 노출됐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막상 현장에 도착해서 진흙처럼 변성되어 가고 있는 목관재와 비스듬한 상태로 드러나 있는 철제도끼, 목짧은 항아리와 원뿔모양손잡이달린 항아리를 보면서 심상치 않은 예감이 엄습해 왔다. 

며칠 뒤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칼집에 동검과 철검 4점, 칠기부채 3점, 청동거울 3점 등 책에서 한두 점씩 보던 유물을 한데 다 모아놓은 듯 종류도 다양하고 그 양도 매우 많았다. 며칠간은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신기한 꿈을 꾸었다고 생각이 들었고, 유물을 보는 낮 동안은 몸이 땅을 밟지 못하고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신기한 느낌을 받았다.

↑↑ 사진 3.경산 양지리 1호 나무널무덤 요갱부 출토유물.

책임조사원이었던 필자가 이 정도일진데 현장팀장과 유구를 직접 노출했던 조사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싶다.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기대하던 요갱부가 노출되고 칠기로 장식된 여러 점의 유물이 찬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던 어느 날! 이 생생한 느낌을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마침 조사원들이 모두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조심스레 칠기의 표면을 살짝 두드려 봤다. 그 순간 손이 통통 튕기는 느낌에 혼자 “으악”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그 청량한 소리에 온 몸이 감전되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반짝반짝 빛나는 칠기의 검고 영롱한 자태는 너무 화려해서 장엄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고, 미세한 금이 칠기 표면의 여기저기에서 생기기 시작했다. 보존처리실 직원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응급처치만을 유지하면서 회의 일정이 빨리 마무리되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감정은 매일 매일 유물을 실견할 수 있었던 조사단만이 느꼈던 특권이 아니었을까 싶다. 지면 관계 상 양지리 나무널무덤에 관한 못 다한 이야기 다음 호에서 이어가도록 하겠다.

 김동숙 성림문화재연구원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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