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빛문화재연구원-경산신문 MOU 지역연구자료공유 기획연재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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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인철 한빛문화재연구원. |
고대 문헌자료와 고고(물질)자료가 서로 일치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지만, 두 자료 중 하나를 새롭게 발견하거나 혹은 새로운 연구 성과를 통해 그 역사적·고고학적 사실관계를 다시 논증하게 되는 경우가 간혹 발생한다.
예를 들어, 문헌기록에 나타나는 사명(寺名)을 고고학적 성과를 통해 그 위치를 비정하게 되는 경우나, 사지(寺址)의 발굴조사를 통해 역사적 사료에 없던 고대 사찰을 새롭게 발견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번에 소개하는 경산 점촌동유적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조업했던 기와가마가 발견됐고, 가마의 내부 및 주변에서 ‘신림사(新林寺)’와 ‘신수사(新數寺)’가 적힌 명문(銘文)기와가 다량으로 출토됐다.
만약 점촌동유적이 주변 일대에 기와를 보급했던 ‘공급지’라면, 기와를 받아 사용했던 ‘수급지’는 과연 어디로 추정되는지, 또 어떠한 경로를 통해 유통됐는지 의문이 든다. 지금부터 점촌동유적에서 출토된 명문기와를 통해 고대 문헌자료와 주변 고고자료를 검토하여 기와의 유통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경산 점촌동유적은 평산동에서 신천동까지 연결되는 현재 삼성현로 개설공사사업에 앞서, 2009년 시굴조사와 2010년 정밀발굴조사가 진행됐다. 이 일대는 현재 대구한의대학교 북서쪽, 인터불고 컨트리클럽 북쪽 나지막한 구릉 말단부에 위치한다. 발굴조사 결과, 총 3기의 기와가마가 확인됐고, 약 150여 점 이상의 기와가 출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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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1. 점촌동유적 조사 중 전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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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기와가마는 불을 때는 화구부, 불이 타는 연소부, 그리고 기와가 만들어지는 소성부, 위를 덮고 밀폐하는 천정부, 연기가 배출되는 연도부로 구성되어 있다. 점천동유적의 기와가마는 최초 노출 당시, 천정부가 소성부로 내려앉은 모습을 제외하고, 측면과 바닥이 다소 정연하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상부 천정부를 제거하고 내부조사를 진행한 결과, 화구부의 재층(재의 층)과 연소부의 산화(酸化:산소와 결합될 때 나타나는 흔적), 환원(還元:산소와 분리될 때 나타나는 흔적) 현상, 소성부의 개축 및 보수 흔적을 통해 최소 1~3회 이상 조업했던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내부 바닥에서 확인되는 재층의 시료를 자연과학적(고고지자기학적) 분석 결과, 1150±50년~1410±25년의 사용 시기가 도출됐다. 아울러 가마의 형태(평면의 모양, 단면의 경사 각도, 기타 부대시설의 유무 등)를 고고학적 비교·검토 결과, 인근 대구 각산동유적, 경산 중산동유적, 경산 이안리유적의 고려~조선시대 기와가마의 형태와 유사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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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2. 점촌동유적 기와가마 1호 출토 ‘… 新林寺 …’ 명문기와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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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3. 첨촌동유적 기와가마 2호 출토 ‘新數寺’ 명문기와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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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점촌동유적의 기와가마 1호에서는 ‘領賢 … 新林寺 … 住○造成時 … 施主催 … 性○比’라 새긴 암막새편이 출토됐다. 작은 파편이라 명확한 해석은 불가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림사’라고 하는 사찰의 존재이다. 아울러 기와가마 2호와 3호에서도 ‘新數寺草’를 새긴 암키와편이 다량으로 출토됐다.
이 명문기와는 점촌동유적에서 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6km 정도 떨어진 경산 인안리유적의 기와가마에서도 동일한 명문과 문양을 새긴 기와편이 발견됐다. 이는 당시 신수사를 중심으로 보급됐던 기와의 수급과 공급체계 범위를 유추하게 한다.
그렇다면 두 명문기와를 보급했던 신수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하지만 신수사에 대한 자료는 고도서, 고지도 등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다. 현재로서는 신수사의 위치와 규모, 조성 시기 등 그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으며, 단정하기 어렵겠지만 절명과 시주자 등을 새길 만큼 유명 사찰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경산지역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찰을 찾은 것에 그 의미를 두고, 향후 관련 고고학적 성과와 문헌자료가 더 풍성해지기를 기대한다.
신림사는 16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무락산(현재 무학산)에 그 위치가 기록되어 있으며, 18~19세기 『여지도』, 『해동지도』, 『광여도』 등 여러 고지도에는 오목천의 서쪽 혹은 현성산에 표기하고 있다. 현성산의 위치는 현재 점촌동 일대로 추정되지만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2000년대 초 영남대학교 박물관, 대구대학교 중앙박물관이 조사한 자료에서는 신림사의 위치를 경산 점촌동유적의 남쪽 약 20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추정했다. 현재 이 일대는 과수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지만, 지표에서는 기와편, 자기편 등 유물이 다량으로 확인되고 있다. 점촌동유적과 거리, 지표 채집 유물 등을 고려할 때 신림사의 위치로 추정되는 곳이다.
하지만 신림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처음 ‘금당사(金堂寺)’로 창건하여, 임란 때 소실됐다가 조선 인조 때 다시 중건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신림사의 위치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고고자료는가 그 실마리를 해결할 중요한 단서 중 하나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