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한 많은 이 세상, 좌와 우에 이유도 없이 영문도 모르고
죽임을 당한 임이시여.
가해자와 피해자 너와 나 낡은 구별은 영원히 사라지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향기만 가득하리오.
결코 지울 수 없는 임들의 탑명을
용서와 화해의 위령탑이라 하였으니
이제 우리들의 뒤늦은 속죄를 물리치지 마시고
월출산 기슭에 고이 잠드소서’
2016.11 17 추진위원회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가을바람이 소슬 부는 날, 멀리 자그맣던 월출산이 바로 눈앞에서 장관을 펼치고 있는 영암읍내를 돌아서 구림마을에 도착했다.
영암의 자랑인 왕인박사 탄생지를 감싸고 있는 공원 못 미쳐 왼쪽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서 있고, 주변경관과 어울리는 않는 버스승강장 옆으로 난 오솔길에 들어서자 커다란 돌탑 두 개가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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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림마을 용서와 화해의 위령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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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서와 화해의 위령탑 취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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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작은 돌탑은 앞에, 낙낙장송보다 커 보이는 큰 탑은 언덕 위에 서 있다. 앞의 작은 탑은 ‘순교비’라 새겨져 있고, 뒤쪽의 탑은 ‘용서와 화해의 탑’이라고 새겨져 있다.
두 탑은 한국전쟁 전후 구림마을에서 희생된 민간인들의 원혼을 위로하는 위령탑이다. 순교비는 ‘미제의 앞잡이’라고 희생 당한 기독교인들을 위한 탑이고, 뒤쪽의 탑은 구림마을을 중심으로 군서면 일대 303명의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탑으로 2016년에 건립됐다.
추진위의 성금과 유족들이 낸 배보상금으로 위령탑이 건립되고, 부지는 구림마을의 오랜 모임인 송계(松契)에서 기증했다. 이 송계에서 학교부지를 기증 받은 인근 구림중고등학교도 이런 인연으로 위령제에 학생들이 참여했다.
“이제는 다 잊어버렸지. 가해자도 희생자도 모두 잊어버리고 살지” 마을입구에서 만나 순교비와 용서와 화해의 탑을 안내해 준 구림마을유족회 최영호(87세, 사진) 회장이 기자에게 던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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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림마을유족회 최영호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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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부모형제를 죽이고 죽임을 당한 철전지 원수 같은 사람들이 지난날을 잊고 용서하고 화해를 할 수 있었을까?
경산지역의 경우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자들은 같은 지역 내에 있는 국민보도연맹원 피학살자들이 자신의 부모형제를 죽인 가해자 편일 수도 있다는 이유로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냉담하며 완전한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구림마을의 이 같은 용서와 화해의 아름다운 행위를 구림마을의 오랜 전통과 공동체의식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지난 2018년 12월 영암을 찾은 일본 역사학계의 이단아 도쿄 가쿠게이대학교 이수경 교수는 용서와 화해의 위령탑에서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고 한다.
“호전주의자들의 이념 대립에 이용된 동족 공간의 가해자도 또한 피해자다. 이렇게 슬픈 피해자 가족들의 다가서기를 통한 공생의 모색과 화해란 해탈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영암 구림마을은 어떤 마을인가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IHT)이 인터넷판에 ‘한국의 마을, 야만의 과거로부터 화해를 찾다’는 기사에서 마을에서 일어난 숨겨진 비극을 조명하고 화합을 위해 애쓰는 주민들의 모습을 소개한 구림마을은 어떤 마을일까?
2200년의 역사를 가진 구림마을은 전남 나주시 금안동과 전북 정읍시 무성리와 함께 호남 3대 명촌(名村)으로 꼽히는 전통마을이다. 국립공원 월출산 주지봉에서 뻗어 나온 두 줄기 구릉이 마을을 넉넉하게 감싸고 있다. 마을에서 바라보면 너른 들판에 드라마틱한 바위산이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가 펼쳐진다.
창녕 조 씨, 낭주 최 씨, 해주 최 씨, 함양 박 씨 4성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으며, 서구림리, 동구림리, 도갑리 등 12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400년 넘게 보존된 창녕 조씨 종택과 죽정서원은 물론이고 울창한 솔숲 사이에 있는 회사정도 수려한 풍광을 자랑한다. 회사정은 남도에서도 아름다운 누정으로 꼽히는 정자다. 특히 향약을 실천하기 위해 마을 자치 모임으로 조직된 400년 전통의 구림 대동계의 모임 장소이다.
3·1운동 때에는 독립만세를 외쳤던 곳이다. 회사정의 대동계 활동을 기록한 영암 구림 대동계 문서(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8호)가 위대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영암의 자랑이기도 한 왕인 박사와 도선 국사가 바로 구림마을 출신이다. 백제 때 일본에 학문을 전파하고 일본 왕의 스승이 된 왕인 박사, 풍수 도참사상의 도선 국사 외에도 고려 왕건의 책사였던 최지몽 등 당대의 걸출한 위인들이 수두룩하다.
1950년 구림마을에는 어떤 일이
“안개가 짙게 낀 새벽 총소리에 놀라 뛰어나오는 마을 사람들에게 경찰의 무차별 사격이 가해졌지요. 무슨 일인가 담 밖을 내다보던 사람, 도망가던 사람,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살육이 이어졌습니다”
구림마을의 아픔은 7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림마을의 교차학살의 출발은 49년 빨치산 간부 현영삼 무리가 은거하고 있는 것을 나무하러 간 사람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 사살된 후 잔존세력들이 전쟁 발발 후 입산하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구림마을 주민 20~30명이 우익단체들에 의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처형됐다. 1950년 10월 7일에는 후퇴하던 좌익 세력의 방화로 우익으로 지목된 사람과 기독교인 28명이 희생됐다. 수복 이후에는 경찰이 구림 지역에 진입하면서 희생자가 나왔다.
영암경찰서 소속 김준병 경위가 지휘하는 영암경찰서 서남지역 토벌작전 병력 100여 명이 1950년 10월 17일 새벽 구림 지역에 도착해 밭일을 하러 나가던 사람과 부녀자, 초등학생, 교사 등 수십 명에게 총격을 가해 44명이 희생됐다. 무고한 민간인들이 좌·우익에 의해 번갈아 희생되는 아비규환은 51년까지 계속됐다.
인민군이 영암에 입성하기 직전 보도연맹에 대한 학살이 있었고, 인민군이 입성한 직후에는 경찰과 우익세력에 대한 숙청이 자행됐다.
다시 국군이 수복했을 때는 공산세력에 동조한 민간인들에 대한 군경의 대량 학살이 있었고 전쟁이 게릴라전으로 장기화된 이후에는 빨치산과 국군이 번갈아 영암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농사일밖에는 모르는 수많은 민초들이 희생된 것이다.
이처럼 점령세력이 바뀔 때마다 희생자와 가해자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수십 년 동안 함께하며 벼를 베던 담 너머 이웃들은 내 부모와 형제를 죽인 철천지원수가 돼버렸다. 야만의 시간을 거치며 보복의 악순환은 51년 전쟁 중에도 계속됐다.
지난 76년 순절비가 세워졌지만 빨치산과 좌익에 의해 희생된 이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오랜 군부독재 시절 동안 경찰과 우익에 의해 희생된 이들은 위령비는 커녕 왜 죽었는지조차 입도 뻥끗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진실이 조금씩 밝혀지면서 가해자가 좌익이든 군경이든 무고하게 숨진 민초들의 원혼을 함께 위로하고 화해하자는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구림마을 주민들은 지난 2006년부터 좌우익 구분 없이 희생자 모두를 기리는 구림위령비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최재상)를 구성하고 건립운동에 들어갔다. 금방 세워질 것 같던 위령탑은 무려 10년 이 지난 2016년에야 송계에서 제공한 솔숲 안에 세워졌다.
길이 7m, 높이 4m에 이르는 위령탑에는 구림마을을 포함해 군서면 일대 303명의 희생자 이름이 빼곡히 새겨졌다. 추진위는 유족회로 자연스럽게 전환됐다.
당초 2010년 완공예정으로 위령탑 건립을 추진했던 구림위령비건립추진위 관계자는 “서민들은 이처럼 화해하고 용서하는데 정치권은 시기마다 지역감정을 되살리고 이념논쟁을 부추겨 용서와 화해를 가로막는 것 같다”고 꼬집기도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한국전쟁 시기 좌우익에 의한 교차학살된 수많은 지역 가운데 구림마을은 화해를 이룬 대표적인 지역이자 화해의 성지가 되었다.
화해의 시작은 가해자의 반성에서 출발
진정한 화해의 시작은 가해자의 반성으로 출발한다. 반성 없는 화해는 바람직한 과거사 정리 모델이 될 수 없다. 구림마을의 화해에는 불완전하나마 가해자인 경찰의 반성이 있었다.
2007년 11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는 1950년 10월 좌익토벌작전을 벌이던 경찰이 구림마을에 진입해 민간인 62명을 사살한 사건에 대해 “경찰이 불법으로 주민들을 사살한 민간인 희생 사건”이라고 결정을 내리고 “희생자 유족에게 사과하고 희생자의 명예회복을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당시 노병현 영암경찰서장이 2008년 구림마을 위령제에 참석해 추도사를 통해 “사건의 진상이 재조명되고 이제야 고인과 유족들의 명예가 회복되는 계기가 만들어져 다행”이라며 “비록 전시였다고는 하지만 국민의 신변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공권력에 의해 적법한 절차 없이 주민이 희생된 사건에 대해 깊은 성찰과 함께 유감과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밝혔다.
경산지역의 대표적인 민간인집단희생지역인 경산코발트광산사건은 무고한 민간인 3500여 명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고, 유해도 520여 구가 수습됐지만 아직도 가해자인 경찰과 군인이 합동위령제에 참석은커녕 반성의 추도사를 한 적이 없다.
구림마을 외에도 금정굴 학살희생자 위령제에는 이기태 일산경찰서장이 경찰청장을 대신해 참석, 추도사를 낭독한 바 있다. 경기와 호남의 경찰과 영남의 경찰이 다르지 않을진데 경산지역은 아직도 치외법권지역인가?
비록 경찰의 추도사 수위가 ‘반성’이 아닌 “성찰”, ‘사죄’가 아닌 “유감”으로 미흡하다는 반응이지만, 경찰 책임자가 직접 위령제에 참석해 잘못을 인정하고 유감의 뜻을 나타낸 것만으로도 진일보한 평가되었다. 미흡하지만 여기서 화해가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조영호 구림마을유족회 사무국장 인터뷰>
“희생자들은 좌익과 우익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들 모두가 비극적인 역사의 희생양이니까요”
지난 9월 2일 군서면 서구림마을에서 만난 조영호 구림마을유족회 사무국장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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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부터 필자, 조영호 사무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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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들이 돌아가셨습니까?영암군 금성면이 빨치산의 주 활동근거지였는데 순진한 람들이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에게 이용당했지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동조했다고 봅니다.
-구림마을에서만 위령제를 지냅니까?
우리마을 말고도 영암군 전체가 체육관에서 합동위령제를 지냅니다. 보통 10월 말 경에서 11월 초에 지냅니다. 주로 저희 영암향교에 의뢰를 하지요. 저도 축하러 몇 번 갔습니다.
-지난 2016년에 위령탑을 건립했는데 이후 변화는 있습니까?
추모비를 세우고 나서는 더 이상 옛날 얘기를 하지는 않죠. 다만 좀 아쉬운 거는 학생들이나 자라나는 세대들이 여기 와서 계속 이걸 기억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아 아쉽죠.
한국전쟁이 뭔지, 전쟁이 나면 모든 걸 잃는다,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야 하잖아요. 평소에 반전 평화 인권교육이 필요한 거죠.
-화해에 앞서 가해자들의 반성이 있었습니까?
아무래도 한 마을에 거주하다 보니까 나이 드신 분들은 아시더라고요. 누군지는 알겠지만 모은척하죠. 지금은 같이 모임도 합니다.
-진실규명 후 첫해 경찰서장이 추도사를 했던데 이후에도 계속 오나요?
경산은 아직도 경찰이 참석하지 않거든요. 지금은 위령제를 면사무소에서 주관하기 때문에 면장, 파출소장, 조합장도 참석해서 초헌 아헌 종헌을 합니다. 작년하고 재작년에는 코로나로 유족끼리만 봉행했습니다.
서장이 새로 부임하면 향교에 와서 부임인사를 합니다. 군수도 마찬가지로 당선되면 꼭 향교에서 고유제를 지내기 때문에 계속 할 것 같습니다.
-사무국장님이 지금 제일 바라시는 거는 자라나는 세대들인 청소년들이 위령제에 참석하는 거죠?
그렇죠. 교육청에서나 아니면 일선 중고등학교에서 이걸 교과목으로 편성하거나 최소한 위령제 때라도 와서 전쟁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자는 겁니다. 구림중학교는 우리 송계서 땅을 줬는데 교장 선생님이 관심이 있어 학생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교장선생님이 바뀌니까 오지 않고, 교장마다 다르더라고예.
-이제 구림마을에서는 피의 학살, 보복 이런 게 단어가 없어졌네요?
그렇죠. 이제 그걸 떠올리는 사람은 없죠.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그런 걸 꺼집어내면. 가해자랄지 피해자랄지 이런 개념이 없어지다 보니까 서로 자기들끼리 뜻이 맞으면 결혼을 하고. 어쨌거나 오래 되다 보니까 결혼할 나이 정도 되면 그때 당시에 가해자 피해자는 전부 다 할아버지고, 그런 얘기 꺼낸 적도 없고 하니까 서로 결혼하고 하는 거죠.
-사무국장님이 유족회 사무국장, 향교 총무장의 외에도 11개 단체를 이끄시면 농사는 언제 짓습니까?
원래 여기서 농사짓고 산 게 아니고 직장생활을 했어요. 축협에서 한 20년, 경기도에서 직장에 다닌다고 10년 이상 나가있었죠. 그러다가 고향에 휴가 왔다가 어머니 혼자 홀로 계시는데 상당히 힘들어 하시더라고요. 연세도 있으시고 그래서 귀향을 결심했습니다.
-마을에 400년 전통의 대동계가 유지되고 있다고 하던데?
대동계는 전국적으로 많이 있었잖아요. 지역별로 다 있죠. 지역별로 있는데 여기는 좀 특이하게도 모든 문서들이 다 보관이 돼 있습니다. 지금도 대동계에 가입하려면 진짜 힘듭니다.
대동계 규약, 규율이라고 하죠. 굉장히 엄격했어요. 지금도 대동계에 가입하려면 가입금이 1천만 원쯤 들어갑니다. 가입결정은 바둑알로 하는데 반대를 뜻하는 흑은 둘로 치죠.
그리고 아직도 우리 대동계는 현금을 상당히 보유하고 있습니다. 농협 벼 수매가격도 대동계에서 결정할 정도로 영향력이 크죠.
-예전부터 마을의 주민공동체가 강했네요?
그죠 굉장히 강했죠. 모든 마을의 대소사는 협의를 통해서 처리했죠. 옛날에 어르신들 혼인을 할 때 당신 아버지가 혹시 대동계원이라면 대동계원이랑은 얼굴도 안 보고 결혼을 시켰다고 할 정도로 엄격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대동계원들이 한 70여 명 되는데 1년에 한 번씩은 꼭 모이죠.
조영호 사무국장을 통해 구림마을의 반성과 화해의 위령탑이 마을의 오랜 공동체의식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450년, 500년 이어오는 대동계와 같은 이런 전통들 때문에 마을에 큰 우환이 있었지만 주민들 스스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