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지역의 집단희생사건 두 유족회가 한자리에 모였다.
사단법인 경산코발트광산유족회(이사장 나정태)와 박사리유족회(회장 윤성해)가 지난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72주년이 되는 날 역사적 상처와 화해를 위한 자리에 마주 앉아 그동안의 아픔을 위로하고 화해와 상생의 길로 나아가자고 덕담을 나눴다.
특히 윤성해 박사리유족회장은 인사말에서 “우리는 그동안 말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 말조차 꺼낼 수 없었던 코발트광산 유족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해 동병상련을 겪으며 지난 70여 년을 고통 속에서 살아온 삶들을 뒤돌아봤다. 나정태 코발트광산유족회장은 “같은 피해자이면서 서로 외면하며 살아왔던 지난 세월이 야속하다”며 “앞으로는 합동위령제도 지내고 특별법 제정에 뜻을 모으는 등 서로 간에 왕래도 하며 살아가자”고 말했다.
경산지역에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3가지 유형의 민간인집단희생사건이 각각의 유족회를 구성해 진싱규명과 명예회복 활동을 펼치고 있다.
첫 번째는 지난 1949년 11월 29일, 팔공산 갓바위 근처에 은신하고 있던 무장공비에게 한 마을 주민 38명이 졸지에 목숨을 잃은 와촌면 박사리사건유족회(회장 윤성해)다. 두 번째는 한국전쟁 직전 군경이나 우익에 희생된 한국전쟁전 경산유족회(회장 박치간)다. 마지막으로 한국전쟁 전후 코발트광산과 인근 대원골에서 약 3500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지역 내 가장 큰 규모의 사단법인 경산코발트광산유족회(회장 나정태)다. 박사리유족회는 사건 발생 직후 결성돼 지금까지 자유수호 반공희생자 위령제를 자유총연맹 경산시지회의 주관으로 이어오고 있다. 경산유족회는 지난 2009년 진실규명 결정과 사법부 소송을 전후해 코발트광산유족회와 함께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경산코발트광산유족회는 진실규명 직전 사단법인으로 전환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코발트광산/박사리에서는 언제, 어떤 사람들이 희생됐나? 가해자는 누구였나?
박사리사건은 1949년 11월 29일(음력 10월 10일) 저녁에 일어났다. 어둠이 짙게 깔릴 무렵, 온 마을에 괴기가 감돌기 시작할 무렵, 총과 죽창, 긴 칼을 찬 검은 그림자들이 골목을 점령했다. 중요한 연설을 한다며 사랑방에서 놀고 있는 청·장년들을 논마당에 끌고 나갔다.
어디서 총성이 들렸다. 그것을 신호로 마을 전체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공비들은 집집이 습격했다. 도망칠 기미가 보이면 바로 몽둥이와 칼을 휘둘렀다. 학살의 현장에는 놈들의 무자비한 광란의 칼춤이 바람을 갈랐다. 잔인한 칼날에 꽃다운 젊은이들의 선혈이 낭자했다. 그들은 두어 시간 만에 무고한 청·장년 38명을 죽이고, 16명에게 큰 상처를 입혔으며, 초가 108채를 불태웠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총과 죽창을 든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그해 가을, 팔공산에 나무하러 간 박사리 옆마을 동강리에 사는 도달권이 양시골兩城谷에서 공비의 소굴을 발견했다. “어디에 사느냐? 신고하면 너와 너희 마을을 박살 내 버리겠다.” 공비들의 서슬 퍼런 위협에 “박사리에 삽니다”고 대답했다. 공비에게 풀려난 그는 바로 지서에 신고했다. 당국은 군경 합동작전을 펼쳐 공비 78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했다.
잔당은 동료의 원수를 갚고자 운문산 공비들과 합세하여 박사리 마을을 습격했다. 소위 보복성 공격이었다. 사건이 끝나고 와촌·하양지서의 경찰과 영천 주둔군 병력이 출동하여 팔공산으로 추격전을 벌인 결과 공비 20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했다.’(경산시지. 매일신문 1975. 6. 25) 증언에 따르면 생포한 한 명을 유족과 주민이 보는 앞에서 공개 처형했다. 박기옥은 군경 합동작전을 펼쳐 ‘공비 78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했다는 기록은 오류라고 인정했다.
경산코발트광산민간입집단희생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초부터 9월초까지 경산지역을 비롯해 청도 연천, 대구 멀리는 영동지역 국민보도연맹원 약 1000명과 대구형무소 수감자 약 2500명 등 총 3500명이 학살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도연맹원은 경산 약 400명, 청도 약 400명, 기타 영천 영동 대구지역 약 200명 등으로 추산된다.
이 숫자는 4대 국회가 지난 1960년 진상규명을 위해 접수한 유족 명단(경산 356명, 청도 474명)에다 2000년 이후 유족회 활동에 참가하고 있는 기타 지역 유족들의 숫자와 그동안 시민단체와 유족회에 유족신고 여부를 문의해온 숫자를 감안해 추산한 수치다.
그리고 대구형무소 수감자 약 2500명은 마찬가지로 대구형무소에서 군경에 인계된 1402명의 명단(4대 국회 자료)과 당시 대구형무소에서 부산형무소로 이감한다며 군경에 인계됐으나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지 않은 숫자가 총 2574명이라는 보도(국민일보)를 근거로 추산한 것이다.
국민일보는 「60년 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 보고서를 토대로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입수한 50년 당시 대구형무소 재소자 인명부, 재소자 인원일표 등의 자료와 국회 양민학살특위 속기록을 종합해 분석한 결과, 대구형무소의 경우 국회 양민특위 보고서는 7월 중 피학살자를 1402명으로 확정했으나 50년 7월부터 10월까지 대구형무소에서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것으로 기록된 1404명의 명단을 추적한 결과 이 가운데 1172명이 추가로 부산형무소 재소자 명부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돼 대구형무소에서 타 형무소로 이감되는 과정에서 사라진 재소자수는 모두 2574명으로 집계됐다」고 보도했다.
가해자로 밝혀진 군인과 경찰은 누구인가?
코발트사건의 직접적인 가해기관은 각 지역 경찰서, 경북지구CIC 및 각 지역 CIC파 견대, 그리고 국군 제22헌병대이다. 이들은 내무부 치안국-경북지방경찰국-각 경찰서, 육군본부와 경남북지구 계엄사령부로 이어지는 지휘 ·명령체계 속에서 가해행위를 자행했다.
상부로부터의 직접적인 사살명령 여부 및 내용을 자료로써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각 가해기관의 참고인으로부터 가해사실을 확인했다. 결국 이와 같은 불법사살에 대한 지휘책임은 군경을 관리 감독해야 할 국가에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사건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일차적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군과 경찰이 관할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들과 대구형무소에 미결 또는 기결상태로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을 불법 사살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이다. 비록 전시였다고 하더라도 민간인들을 예비검속하여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살한 것은 명 백한 불법 행위이다.
코발트/박사리 진상규명과정은?
박사리사건이 일어난 지 12년 후인 지난 1961년 경산시는 박사리 마을이 있는 대동초등학교 운동장에 ‘반공혼비’를 세웠다. 세월이 흘러 비문이 훼손되어 1985년 박사리 도로변에 ‘반공희생자위령비’를 건립하고, 2015년 3억 5000만 원을 들여 추모공원을 조성했다.
그리고 경산시는 매년 10월에 열리는 추모제에 제수비 200만원을 주관단체인 자유총연맹 경산시지회를 통해 지원하고 있다. 위령비와 추모공원 관리는 와촌면사무소에서 하고 있다.
박사리는 1기 진화위에 진실규명 신청을 했으나 당시 위원회는 2009년 하반기 보고서를 통해 “1947년 12월부터 53년 3월까지 발생한 한국전쟁 전후 적대세력에 의한 피해사건에 대한 조사결과 진실규명 대상자 총 98명과 조사과정에서 인지된 미신청자 43명 등 총 141명이 희생, 상해를 당하거나 행방불명 혹은 강제 연행된 사실을 확인 또는 추정했다”며 “특히 경산지역 박사리 사건의 경우는 우익단체와 관련성이 없는 농민들이 주로 희생 당했다”고 밝힌 바 있다.
2018년 1월부터 본격적인 ‘명예회복 탄원서 서명운동’에 시동을 건 유족회는 약 5000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 2021넌 11월에는 총 2만 5000명이 서명한 탄원서와 함께 관련 자료를 ‘국가권익위원회’에 보냈으나 접수된 문건은 돌려주기 어렵다. 후속 부서에 넘기겠다” 는 답변만 받았다.
2기 진화위가 출범한 후 2021년 9월, 박사리사건유족회는 임시총회를 열어 2기 진화위에 진실규명 신청서를 접수하기로 하고 약 3개월 동안 서류를 접수, 작성해 사망자 38명 중 33명, 부상사 16명 중 15명 등 총 48명의 진실규명 신청서를 진화위에 접수 시켰다. 행방불명 또는 연락이 닿지 않은 나머지 6명도 계속 추적하여 진실규명신청을 할 계획이다.
코발트광산은 학살이 일어난 후 10년이 지난 1960년 7월 경산중앙초등학교에서 경북유족회(회장 이원식) 차원에서 합동위령제를 지냈다. 이후 피학살자실태조사회(회장 김종석, 실무 강창덕)를 조직해 유가족들로부터 피해자 신청을 받아 356명이 제4대 국회 양민학살 특위에 제출했다.
이듬해 군사쿠데타로 유족회 간부들이 수감되면서 진상규명 활동이 중단됐고, 다시 2000년 3월 경산코발트광산유족회(공동회장 류윤암 이동철 이태준)가 설립돼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활동에 매진했다.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되고 위원회가 구성돼 2007년부터 3년간 유해발굴을 실시, 수평굴과 수직굴에서 총 420구를 발굴수습했다. 드디어 2009년 11월 17일, 군경에 의한 불법처형이었다는 진실규명 결정서가 발표됐다.
유족들은 이 결정서에 근거해 소송을 제기해 2016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해 일정금액을 배보상금 형태로 받았다. 소송이 진행되던 2013년 경산시는 7억원의 예산으로 부지 300평을 매입하고 안전데크 등을 설치했으며, 2016년에는 3억원으로 위령탑을 건립했다.
코발트/박사리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나?
박사리유족들은 매년 10월말 자유총연맹 경산시지회 주관으로 자유수호 반공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제수비는 200만원.
반면 코발트유족회는 한국전쟁전 경산유족회와 합동으로 경산시와 청도군으로부터 제수비 600만 원을 지원받아 매년 음력 9월 9일 갱도 앞에서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박사리와 코발트유족회는 각기 현재의 위령탑이 서 있는 장소를 기억의 공간으로 확대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코발트광산유족회는 박사리와는 달리 학살 장소 및 유해가 온전히 보전돼 있어 배보상과 함께 과거사 정리의 또 다른 축인 추모와 기념문화의 확산에도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유족회는 코발트광산과 선광장이 일제의 지하자원수탈과 강제동원 등 3가지 근현대 중요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사의 비극을 후속세대에게 교육하는 일에 아주 적절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 유해 수습과 안장, 현장보전과 주변정비, 기록물보관소 및 순례객 편의시설 등을 설치하기에 노력하고 있다. 이런 사업의 책임 있는 주체 역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최근 과거사 청산 또는 정리는 흔히 진실규명, 피해자의 명예회복, 가해자의 법적 책임 규명과 처벌을 통한 정의의 실현,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화해와 통합, 그리고 과거사의 비극을 후손에게 교육하는 일 등을 포함한다.
특히 바람직한 과거사 정리는 진상규명의 단계를 넘어 비극적인 과거사가 남긴 상흔의 치유, 진지한 화해와 윤리적 기억을 지향해야 한다(레너 페브레스, 2009, 264-265)한다는 점에서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관련된 기억을 새로운 역사로 승인하며 이를 통해 후속세대를 교육시키는데 주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코발트광산과 선광장 등 역사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함으로써 민주적 인권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 또한 단한번의 ‘청산’이 아니라 끊임없는 성찰의 과제를 제시하면서 바람직한 과거사 정리의 흐름을 다시 한번 일깨워줄 뿐만아니라 기억의 역사화에 대한 경시나 비극적인 과거사의 망각이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해악을 끼칠 뿐이며 진지한 화해정책은 평화와 인권존중의 문화를 지향해야한다는 교훈을 줄 수 있다.
코발트유족회와 박사리유족회에 거는 기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집단희생사건 유족 가운데 그동안 적대세력에 의한 피해자 유족들은 국민보도연맹원을 좌익으로 간주해 이들이 직접적인 가해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유족들을 적대시해 왔다. 한 지역에 있으면서도 교류가 없다보니 박사리 일부 유족들은 코발트광산 유족을 가해자의 일부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6월 25일 경북시민재단 주관으로 압량읍 행족발전소에서 열린 코발트 박사리 유족회의 “역사적 상처의 치유와 화해를 위한 평화문화 캠페인”은 그동안의 오해와 앙금을 풀고 화해를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고 볼 수 있다.
이날 두 유족회 회원들은 그동안 아껴왔던 자신들의 감정을 조심스럽게 꺼내고, 향후 두 유족회가 지역에서 어떻게 협력해 나갈지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 포럼을 기점으로 경산코발트광산과 박사리 유족회는 서로의 역사적 상처를 이해하고 화해함으로써 이후 지역에서 두 사건을 널리 알리는 동시에 경산지역의 인권의식 고취 및 평화문화의 정착과 확산으로 이어가기 위한 방안을 지속적으로 마련해 나가기로 한 것이다.
특히 이 자리에는 정근식 제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과 윤두현 국회의원,조현일 시장 당선인 등이 참석해 두 유족회 회원들을 위로했다.
코발트유족회와 박사리유족회의 만남은 단순히 두 유족회 간의 만남으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 이날 포럼 발제를 맡은 영남대 국어국문학과 김문주 교수는 “코발트와 박사리사건은 보수 진보의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라며 “세 유족회의 만남을 통한 치유와 화해를 넘어 시민교육으로 확산되어야 진정한 화해의 의미를 담을 수 있다”고 말했다.
미술중심 보물섬 최성규 작가는 “독일 노드라인베스트팔렌주의 인구 31만 도시 뮌스터라는 유럽 30년 전쟁의 상흔이 깊은데 10년에 한번 씩 열리는 국제적인 미술제인 뮌스터 프로젝트로 유명하다”며 “제가 몇 년 이곳에 살아볼 기회가 있어서 살펴본 뮌스터는 10년에 한번씩 열리는 국제미술제에 대한 시민들의 자부심이 매우 높고, 그것을 준비하며 생성된 뮌스터 시민들이 쿠바라는 문화예술교육기관을 중심으로 스스로 문화예술활동을 실천하고 있다”고 밝혔다.
코발트:박사리유족회 두 유족회 간의 만남이 국가폭력으로 희생된 모든 유형의 민간인집단희생 유가족들 간의 화해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는 진실규명 피해자의 명예회복, 가해자의 법적 책임 규명과 처벌을 통한 ‘정의’의 실현,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화해와 통합, 그리고 과거사의 비극을 후속세대에게 교육하는 일 등을 포함하는 바람직한 과거사 청산 또는 정리의 시작이기를 기원한다.
<박사리유족회 윤성해 회장&박기옥 총무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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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부터 필자, 윤성해 회장, 박기옥 총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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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성해 회장. |
-코발트/박사리 유족끼리 연대할 계획은?
사실 몇 년 전부터 경산신문으로부터 연대활동을 제안받았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11월 정근식 진실화해위원장이 경산을 방문하기 전에 코발트광산유족회 나정태 이사장과 박무석 사무국장과 와촌 모 식당에서 만나 상견례를 가졌다.
그리고 올해 6월 25일 압량읍에서 양쪽 유족회 회원들이 한자리에 만나 새로운 시작과 화해를 상징하는 흰 장미와 보랏빛 공작초가 들어 있는 꽃다발을 서로 교환한 것입니다.
올해 코발트광산 위령제를 박사리와 합동으로 지내자는 제안을 받았는데 저는 꼭 참석할 예정이다. 그러나 유족회원 전체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시간이 좀 더 흘러야 할 것 같다. 유족회원들과 상의도 해야하고... 천천히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총 48명의 진실규명신청서를 제출했는데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정부와 지자체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올 추석 전에는 아마도 사망자 38명과 부상자 2명에 대해서는 진실규명이 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진실규명이 된다고 해도 박사리 유족회는 코발트유족회처럼 소송을 통해 국가에 배보상을 청구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특별법, 제주4.3과 여순사건처럼 일괄적으로 배보상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유족들은 “액수가 크던 적든 우리가 죽기 전에 받을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입장입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사망자에 대서는 이설이 없겠지만 부상자에 대해서는 부상정도에 따라 차등 보상방식이 된다면 아마도 앞장서서 일한 분들이 곤란해지지 않겠나 하는 점입니다. 부상자에 대해서도 부상사실이 확인되면 일괄 보상방식으로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특별법 제정을 위해 코발트광산 유족회와 함께 손잡고 정치인과 지역인사들을 만날 것이다. 힘을 합쳐야 한다. 이철우도 지사, 조현일 시장님도 우리 유족들을 위해 각별한 관심과 성원을 아끼지 않았으면 바랍니다. 목민관이라면 당연히 지역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펴야 합니다.
-<박사리의 핏빛 목소리>책을 내셨는데 계기가 있었습니까?
73년의 긴 역사 속에서 우리 유족들의 한이 얼마나 깊었겠어요? 그런데 한번도 국가로부터 보상이 없었다. 이 돈을 떠나서 너무나 마음의 상처가 깊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 기록이 역사에 남겨야 되겠다. 아니면 영원히 역사 속에 묻힌다. 이것을 세상에 알려야 되겠다 해서 집필하게 된 동기가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유족들의 38명, 부상자 16명 그리고 그 당시에 목격했던 나이 많은 여러 마을에 생존해 계신 분들의 이야기를 총체적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2021년도에는 중앙지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가 와서 직접 취재를 하고 아마 그것이 파급효과가 돼서 <박사리의 핏빛 목소리> 박사리의 억울한 목소리가 전국으로 알려졌고, 언론 홍보의 효과가 얼마나 큰지 이번에 실감을 했습니다.
현재 전국적으로 현재 한 2만 건이 진실규명신청서가 접수됐는데 진실규명 작업에 도움이 많이 되었다고 개인적으로 저한테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우리 유족들의 마음이 하루빨리 치유가 될 수 있도록 진실하규명을 위해 계속 노력해 주기를 부탁드리고, 국회 차원에서는 이거 하루빨리 배보상 특별법을 제정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국회의원이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참고
<박사리의 핏빛 목소리>, 홍익출판사, 박기옥.
진실화해를 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코발트광산 진실규명결정서> P91, 2009,11,17
진실ㆍ화해위원회 이후 아르헨티나와 페루의 배ㆍ보상과 추모정책, 박구병, 아주대학교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