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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연구자료공유 기획연재 (17)] 경산 금호강변에 자리 잡은 청동기시대 마을과 옛 무덤들

경산신문 기자 입력 2022.08.25 11:04 수정 2022.11.03 15:23



(재)한빛문화재연구원-경산신문 MOU            지역연구자료공유 기획연재 (17)

 
↑↑ (재)한빛문화재연구원 조사과장.
경산 내리리유적은 대구대학교의 기숙사 2단지 및 게스트 하우스를 조성하기 위한 부지에서 확인됐다. 

대구대학교는 사업시행 이전 매장문화재의 유존여부를 조사했고, 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 2003년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삼국시대~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지표상에서 확인 됐다.
 
이 후 (재)한빛문화재연구원(당시 대경문화재연구원)에서 2007년 7월부터 같은 해 11월까지 시굴조사를 실시했고, 이 결과를 바탕으로 2008년 12월부터 2009년 10월까지 10개월간 36,500㎡ 면적에 발굴조사를 시행했다.

유적은 금호강과 대창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남쪽 낮은 구릉 정상부와 사면부에 해당하며, 금호강의 남쪽에 범람으로 인해 형성된 충적평야지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 내리리유적 원경.

↑↑ 널무덤 9호 젼경.

유적에서 조사된 유구는 청동기시대 집자리(住居址) 13동, 돌널무덤(石棺墓) 1기, 원삼국시대 나무널무덤(木棺墓) 9기, 옹관묘(甕棺墓) 14기, 조선시대 토광묘(土壙墓) 43기, 굴립주 건물지 1동 등 모두 88기가 조사되었다. 

출토된 청동기시대 유물은 무문토기(無文土器), 단사선문토기(短斜線文土器), 붉은간토기(赤色磨硏土器), 어망추(漁網錘), 돌도끼(石斧),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돌창(石槍), 돌화살촉(石鏃) 등이 출토됐다.
 
원삼국시대 유물은 삼각형점토대토기(三角形粘土帶土器), 주머니호, 철검(鐵劍), 철모(鐵矛), 철낫(鐵鎌), 철도끼(鐵斧)와 검손잡이 장식(劍把頭飾)이 출토됐다. 조선시대 유물은 분청자(粉靑磁), 백자(白磁), 청동숟가락, 남성용 비녀(동곳)등이 출토되었다.
 
↑↑ 넘무덤 출토유물.

↑↑ 토광묘 출토유물.


각 시대별 유구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청동기시대 집자리(住居址)는 금호강과 대창천이 바라보이는 구릉의 정상부와 사면에 입지하며, 주축방향은 강의 흐름과 나란하거나 등고선과 평행하게 위치한다. 

구릉의 정상부에 세장방형(細長方形)의 규모가 큰 집자리가 입지해있고, 낮은 곳으로 갈수록 집자리는 장방형(長方形)에서 방형(方形)으로 규모가 작아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를 통해 청동기시대 마을의 전경을 유추해 보면 공동의 작업공간과 규모가 큰 건물이 구릉 정상부에 자리하고, 아래로 생활을 위한 집들이 분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 당시 집자리 내부에서 확인된 목탄(木炭)을 방사성 탄소연대측정법을 이용하여 연대를 측정하였다. 

측정 결과 집자리는 기원전 1355년경에서 기원전 785년까지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곳의 마을은 약 600년간 지속됐다.
 
원삼국시대 나무널무덤(木棺墓)은 구릉의 경사면에 위치하며, 장축방형은 등고선과 평행한 동-서향으로 축조되었다. 나무널무덤의 축조방법은 기반암을 굴착한 뒤 무덤구덩이(墓壙)을 조성하고 나무관을 안치했다.
 
기반암 굴착면을 보면 폭 5㎝정도의 괭이와 같은 도구를 이용해 굴착한 흔적이 확인됐다.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은 무덤 내부에서 출토된 철도끼(鐵斧)의 폭이 굴착흔적과 유사한 5㎝ 정도라는 것이다.
 
또한 나무관 내부와 상부, 관과 묘광 사이의 보강토 내부와 외부 등 다양한 위치에서 유물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의 장례 풍습을 추정하게 한다. 출토 유물의 시기는 경산의 임당동과 신대리 유적의 유물들과 비교했을 때 나무널무덤을 조성한 기원전 2세기 후반부터 기원후 1세기 중반까지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토광묘(土壙墓)는 현대의 무덤과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기반층을 굴착하고, 나무관을 안치하거나 관 없이 시신을 바로 묻은 형태이다. 

출토 유물은 분청인화문‘蔚山長興庫’명접시, 분청인화문대접, 백자대접, 청동숟가락, 동곳, 철못 등이다. 이중 명문이 새겨진 분청인화문 ‘蔚山長興庫’ 명접시는 내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생산지와 사용처를 확인할 수 있다.

‘蔚山長興庫(울산장흥고)’ 명문에서 장흥고(長興庫)는 조선시대 방수용 기름종이(油紙), 베(布), 종이(紙), 돗자리 등의 물품에 관한 일을 맡아 하던 관청으로,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조선 태조 때에 설치된 곳이다. 동일한 명문이 새겨진 접시가 기장 장안리 상장안 자기 가마터에서도 출토된 사례가 있다.
 
내리리유적에서 출토된 분청인화문접시와 기장 상장안 가마터에서 출토된 접시는 그 형태와 모양이 유사하며, 문양구성에 있어서도 비슷하다. 아마도 15세기 울산의 장흥고에서 사용될 접시가 기장의 한 가마에서 만들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오늘날 경산 내리리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접시의 여정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경산 내리리유적은 청동기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에 걸쳐 집자지리와 무덤이 조성된 복합유적이다. 금호강변을 따라 청동기시대 마을이 600년간 지속된 이후, 원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 이르기까지 무덤이 조성된 곳으로 경산 금호강변의 고대 문화상을 밝히는 유요한 자료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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