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기획특집 신문사자체

[지역연구자료공유 기획연재 (16)] 경산3일반산업단지에 자리했던 또 다른 경산사람들

경산신문 기자 입력 2022.08.11 11:54 수정 2022.11.03 15:23



(재)한빛문화재연구원-경산신문 MOU          지역연구자료공유 기획연재 (16)

 
↑↑ 김병훈 (재)한빛문화재연구원 조사과장.
경산시 진량읍과 자인면에 조성된 경산일반산업단지는 경산의 대표적 산업단지이다. 이 중 진량2산업단지라는 명칭으로 불리던 경산3일반산업단지는 진량읍 대원리, 신제리, 광석리, 황제리, 신상리, 속초리 일대의 1,497,259㎡ 부지에 조성됐다.

산업단지 계획 수립 후 지표조사를 시행하여 지표에서 유구와 유적의 흔적을 확인했다. 이후 (재)한빛문화재연구원에서 시굴조사(트렌치를 설치해 유구의 성격과 분포범위를 확인하는 것)를 실시했고, 발굴조사구역이 확정됐다.

발굴조사는 (재)한빛문화재연구원에 의해 2008년 1월부터 2009년 3월까지 이뤄졌으며, 조사지역의 면적은 26,858㎡이고, 4개 유적(대원리유적Ⅰ, 대원리유적Ⅱ, 신제리유적, 광석리유적)으로 나누어 조사를 시행했다.

발굴조사 결과, 무덤유구는 원삼국시대 나무널무덤(목관묘:木棺墓) 6기, 삼국시대 봉토분(封土墳) 2기, 돌덧널무덤(석곽묘:石槨墓) 27기, 돌방무덤(석실묘:石室墓) 2기, 통일신라시대 화장묘(火葬墓) 1기, 조선시대 토광묘(土壙墓) 10기 등이 조사됐다.

생활유구는 건물터 3동, 굴립주 건물지(원두막과 같이 지상에 바닥이 있는 건물) 15동등이 조사됐고, 생산유구는 기와가마, 목탄가마 각각 1기씩 확인됐다.

출토 유물은 총 580점이다. 먼저 주머니모양 항아리(주머니壺), 짧은목 항아리(短頸壺), 쇠뿔모양손잡이 항아리(組合式牛角形把手附壺), 손잡이 항아리(把手附壺) 등의 토도류(土陶流)와 철도끼(鐵斧), 철창(鐵矛), 철사(鐵砂), 철낫(鐵鎌), 작은칼(刀子) 등의 금속류(金屬流) 등 원삼국시대 유물이 확인됐다.

삼국시대의 것으로 굽다리접시(高杯), 뚜껑(蓋), 뚜껑있는 굽다리접시(有蓋高杯), 낮은굽다리접시(短脚高杯), 짧은목 항아리(短頸壺), 긴목항아리(長頸壺), 굽다리긴목항아리(臺附長頸壺), 큰항아리(大壺), 손잡이가 붙은 잔(把杯), 병 등이 확인됐다.

↑↑ 광석리유적 목관묘 출토유물.

↑↑ 대원리유적 출토유물.

이외 목걸이(頸飾)와 장신구류, 작은칼(刀子), 철화살촉(鐵鏃) 등도 출토됐다. 고려~조선시대 유물은 청자, 분청자, 백자, 호, 암막새, 암키와, 수키와 등이 출토됐고, 남성용 비녀(동곳)과 청동숟가락도 출토됐다.

경산일반산업단지 유적의 성격을 대표할 수 있는 유구는 원삼국시대 나무널무덤(목관묘:木棺墓)과 삼국시대 봉토분(封土墳)이다. 원삼국시대 나무널무덤은 광석리유적에서 6기가 조사됐다.

널무덤 축조 집단의 특징은 경산 임당유적과 같이 여러 세대를 이어 고분을 축조한 집단이 아니라 기원후 1세기대의 짧은 기간 동안만 고분을 조성한 것으로 보이고, 출토유물은 위세품은 보이지 않고 토기류와 철제무기류, 철제공구류가 확인된다. 

이를 통해서 볼 때 광석리유적 집단은 경산지역 원삼국시대 경산 임당유적의 하위에 위치한 집단으로 일시적으로 광석리에 나무널무덤을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삼국시대 봉토분은 대원리유적Ⅱ의 낮은 구릉 정상부에 2기가 위치하고 있다. 1호분은 석실을 매장주체부로 가진 단장분(單葬墳)이며, 봉토의 끝자락에는 대호(大壺)와 병(甁)이 의도적으로 파쇄된 상태로 매납됐다. 

이는 봉토 조성 시 제의를 올린 흔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1호분의 매장주체부인 돌방무덤(석실묘:石室墓)은 봉토를 덮으면서 벽석을 함께 쌓아올린 지상식 구조이며, 두침석(頭枕石,시신의 머리 부분을 고정하는 돌)으로 추정되는 편평한 청석이 동쪽 방향에 자리한다.

특히 남서쪽 모서리 부분에서는 인골 1개체가 모여진 채로 확인됐는데, 이는 추가장의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인골을 모아두는 현상은 동일한 시기에 지방의 돌방무덤에서 다수 행해지는 양상으로, 돌방무덤이 가족묘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는 단계이다.

2호분은 3기의 돌덧널무덤(석곽묘:石槨墓)을 매장주체부로 가진 다장분(多障墳)이다. 2호분 역시 청석암을 사용하여 벽석을 쌓았으며, 2-1호 주곽은 구덩이를 파고 벽석을 쌓아올린 수혈식 구조이나, 부곽은 봉토를 성토하면서 축조한 지상식구조로 판단된다. 함께 조사된 2-2호와 2-3호는 수혈식구조이다.

↑↑ 대원리유적 봉토분 1호.

↑↑ 대원리유적 봉토분 2호.
↑↑ 대원리유적 석곽묘 2호.

↑↑ 광석리유적 목관묘 4호.

봉토분 2호가 1호분 보다 앞서서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봉토분 2호 내에서는 2-1호와 2-3호가 축조되고 난 후 2-2호가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출토되는 유물을 통해서 볼 때, 대원리유적Ⅱ는 6세기 초반에 고분이 축조되기 시작하여 6세기 중후반정도까지 고분이 조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곳에 정착한 집단은 원삼국시대인 기원후 1세기 전반에서 중반까지 짧은 기간 무덤을 조성했고, 이후 삼국시대인 5세기 말부터 고분을 축조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 지역 일대 돌방무덤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7세기 초중반까지 분묘 구역으로 활용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0세기 무렵 고려 중기에는 무덤 뿐 아니라 목탄가마 등 생활에 필요한 생산유적이 조성됐고, 조선시대의 기와가마와 건물지 등도 확인되어 생활 터전으로 활용됐음을 알 수 있다.


저작권자 경산i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