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칼럼 인문학 권영호

청천유원지와 포플러 숲

경산신문 기자 입력 2022.06.30 12:13 수정 2022.06.30 12:13

 
↑↑ 권영호 한국인문학진흥원 부원장,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인문학박사.
얼마 전 영천댐 주변으로 답사 갔다가 대구로 돌아오는 길에 4번 국도을 탔다. 물띠미를 거쳐 대구에 가까워지면서 문득 사오십 년 전의 풍경이 떠올랐다. 

아마 물띠미를 지나면서 멀리 금호강과 들판이 아스라하게 눈에 들어오면서 생각도 잠시 과거 먼 시간으로 옮아갔던 것이 아닌가 싶다. 물띠미 고갯마루를 지나칠 때마다 오랜 매운탕 식당이 아직 남아 있는지 확인하곤 하던 버릇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스트로마톨라이트로 유명한 은호리를 지난 후 대구시와 경산시의 경계에 이르기 직전 청천역 부근을 지나갈 때 예전에 대한 기억이 뚜렷해졌다.

7~80년대 이곳은 청천유원지로 불리었다. 지금도 이 지명은 남아 있지만 유명무실하다. 맑은 샘이 난다고 하여 ‘淸泉’이라는 지명을 갖게 된 청천리는 금호강 북편에 충적평야를 앞에 두고 자리 잡고 있다. 근대에 들어 국도 4호선 도로와 구 대구선 철도가 마을 앞을 지나가고 1970년대에 들어 경부고속도로가 철도와 금호강 사이로 났다. 

현재는 비닐하우스가 대부분이 되어버렸지만 청천유원지가 있던 때만 해도 논이었는데, 도로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철길을 건너 금호강 못 미쳐 유원지에 이를 수 있었다. 지금과 가장 다른 풍경은, 특히 여름의 풍경은 포플러 숲이 늘어서 있어 논과 함께 온통 푸른 빛이었다는 것이다.
 
필자에게 청천유원지는 푸르름의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여기에는 ‘청천’이라는 말이 주는 이미지도 한몫을 한 것 같다. 물론 ‘청천’의 한자는 다르지만 포플러 숲과 논의 색이 인상에 깊이 박혀 막연하게 그렇게 여겨진 듯하다. 

이러한 시각적인 각인은 색상의 강렬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필시 그러한 풍경 속에서 겪었던 경험이나 가졌던 생각이 특별했을 것이다. 누구든 나름으로 지니는 추억에는 으레 시각적 이미지가 동반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청천유원지는 사실 크게 특별할 것이 없었다. 매운탕집을 비롯한 식당이 많고 포플러 숲 아래 사람이 많이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정도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청천에 이러한 장소가 생긴 데는 지리적 위치와 편리한 교통이 작용했다고 한다. 대도시인 대구에서 가까운 교외 중에 버스와 기차 이용이 가능한 곳이 많지는 않았을 테다. 

겨우 의식주의 결핍에서 벗어나기 시작할 무렵, 특별한 위락시설이 많지 않던 시대에 청천은 한 번쯤 차를 타고 일상의 공간을 벗어나 흥겨움을 발산하거나, 단체로 미팅하거나, 연인들이 데이트할 만한 곳으로 떠오르는 장소였다. 그래서 당시 청천유원지는 꽤 각광 받는 곳 중의 하나여서 규모가 큰 식당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유원지지만 알고 보면 생존의 현장이었다. 푸르름을 안겨주던 포플러 숲은 산업화 시기 세상 돌아가는 경제를 잘 아는 사람이 나무젓가락으로 쓰이는 목재를 얻기 위해 조성한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호황을 누린 식당가들의 간판은 광주, 부산 등 타지의 지명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식당주들은 아마 먹고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여기저기 돌다가 매운탕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청천유원지에 일시 정착한 것이리라.

이는 식당의 건물들이 임시가옥이 많았던 사실에서 확인된다. 또한 식당들이 늘어나다 보니 논까지 침범해 급조한 식당도 있었다. 어느 한 식당의 상호인지 모르겠으나 청천유원지 대신 불린 ‘청천다락방’도 그런 기억을 뒷받침해준다.

아직 푸른 빛깔이 풍경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초가을에 주워들은 정보로 청천유원지를 찾은 적이 있다. 철길을 막 넘어 걸어가고 있는데 시야에 포플러 숲을 배경으로 유원지 언저리의 논두렁 길을 걷고 있는 흰 고등학교 교복 차림의 남녀 두 학생이 들어왔다. 내가 향하는 방향도 그쪽이었으나 약간 떨어져 걷는 두 학생의 모습이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 듯해 일부러 가까이 가지 않았다. 사람을 피해 야외로 나왔으나 숫기가 없는 남학생이라 손도 잡지 못하고 걷고 있는데 특별한 일도 없이 나온 사람으로 인해 방해받으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간격이 있는 두 사람의 거리는 내가 머무른 한 시간 내내 더 좁혀지지 않은 듯하다.
 
이 단순한 기억이 문득 떠오를 만큼 잊히지 않은 이유는 영화 때문이다. ‘클래식’이라는 영화를 개봉 당시가 훨씬 지난 때 보았는데, 남녀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장소도 강이 있고 미루나무로도 불린 포플러 숲이 늘어서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촬영지가 남이섬인 영화 속의 장면이 오래된 기억 속의 한 장면과 비슷해 50년 가까이 된 얼마 전에도 떠올랐던 것 같다. 아니, 도시를 벗어나면 눈에 들어오는 예전의 풍경을 대표하는 포플러 숲의 각인 때문인지도 모른다. 생장이 빠르고 목재 생산에도 유리하다고 해서 일제강점기부터 많이 심은 탓에 직선으로 솟은 포플러로 인해 전통적인 농촌 풍경이 바뀌었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경산i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