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덧널(木槨)의 주변을 돌아가며 적석(積石)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덧널의 상부에도 두텁게 적석을 올리고, 그것을 점토로 밀봉하며, 다시 그 위쪽으로 고대(高大)한 봉토를 쌓는 것은 오늘날 경주시내 대릉원 일대의 고총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양상이다.
특히 구조적으로 덧널 상부의 적석, 그 위의 밀봉토(密封土, 적석 상부를 감싸는 점토 피복층), 피장자와 유물이 안치되는 시상(屍床, 시신 및 부장품을 올려놓는 무덤의 바닥)의 구조 등이 경주의 그것과 꼭 닮아있다.
두 번째는 경산 재지의 지배층일 가능성이다. 매장주체부인 덧널과 함께 축조된 돌덧널(石槨墓)의 존재와 평면 배치 등에서 재지의 지배층이 부적리 BⅥ호분의 주인공일 가능성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어느 한 지역의 이질적 고분의 피장자에 대한 추정은 이곳 경산지역 뿐만 아니라 전국 어디에도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전라도 지방에서 확인되는 일본 고유의 무덤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의 피장자가 백제인(百濟人)인가 왜인(倭人)인가에 대한 논쟁, 경북 영주 순흥지역 벽화분(壁畵墳)의 피장자가 고구려인(高句麗人)인가 신라인(新羅人)인가, 신라인이라면 수도 경주에서 온 사람인가 원래부터 영주지역에 사람인가에 대한 논쟁.
많은 이해관계와 관점의 차이 등이 있지만, 대부분 해당 지역을 전공으로 삼거나 거주하는 학자들은 이질적 무덤의 주인공을 현지인으로 보는 경향이 농후하고, 그렇지 아니한 경우는 소위 말하는 외지인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여기에서 부적리 BⅥ호분의 주인공이 경주인인가 경산인인가를 결론 내릴 필요는 없다. 고고학 유적, 유물에 대한 해석에 정답은 없으며,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은 넓은 시각으로 해석을 해야 할 필요성은 있으며, ‘우리지역에 있으니 무조건 우리지역 사람이었어야 한다’라는 ‘지역 제일주의’의 관점은 탈피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부적리 BⅥ호분에 대한 발굴조사가 종료되고 어느덧 5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부적리고분군이 사적으로 추가 지정되었음은 물론, 조사과정에서 해체되었던 BVI호분은 봉분은 최근 다시 멋들어지게 복원이 되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지만, 누군가 필자에게 부적리 BVI호분의 발굴에 대해 물어본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도굴’이라 할 수 있다.
봉분의 정수리는 물론 동서남북을 돌아가며 피장자가 잠들어있는 고분의 중심을 향해 탄광의 갱도를 파듯 십 수개의 구멍이 뚫려있던 참상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발굴조사 기법이 나날이 발전하듯이 도굴의 기ㄴ술 역시 그에 못지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도굴갱에서 확인된 시멘트, 우레탄폼, 비계파이프, 각목, 합판, 줄자, 드라이버, 톱, 마대자루, 밧줄, 라면봉지, 빈 생수통 등은 단순히 구멍을 파고 유물을 훔치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들도 무너져 내리는 돌무더기를 피하고, 나름의 안전장치를 행한 것이었겠지만, 그로 인한 고분의 교란과 파괴, 사라져버린 역사적 진실 등은 그 양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부적리고분군이 사적으로 지정되며, 어둡게 우거져있던 수풀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멀리서도 고분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고, 고분군으로 통하는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더 이상의 도굴은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래된 무덤을 도굴하는 자들은 늘 존재하였던 것이기에, 민(民:주민), 관(官:관청), 학(學:전공자) 모두가 노력하고 그것을 예방하기 위해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