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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인문학 권영호

고인돌 산책 (1)

경산신문 기자 입력 2022.01.20 11:45 수정 2022.01.20 11:45

 
↑↑ 권영호 한국인문학진흥원 부원장,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예전에 간절히 기원하는 바가 있을 때 바위를 대상으로 빌곤 했다. 중방동에서 태어난 필자는 갓난아기 때 경기(驚氣)를 자주 해 청도가 고향인 외할머니께서 칠성바위에 매일 비셨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안동 소산에 있는 삼구정(三龜亭)에는 정자 이름의 유래가 된 거북바위 세 기(基)가 있는데 영험이 있는 바위라 노모의 치병을 위해 기도했다는 언급이 기문에 나와 있다. 대구 대봉동 제일여자중학교 교정에 있는 거북바위는 연구산(連龜山)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었다. 영천 청통면 보성리 입구에는 사람의 얼굴을 닮은 그림이 새겨져 있는 암각화 바위가 있다. 청도 금천면 소재 운강(雲崗)고택의 안채 뒤뜰에는 영험이 있다는 칠성바위가 있고, 경산 하양 대학리에 가면 마을 입구에 칠성바위로 불린 7기의 바위 중 3기가 있었다. 경산에서 가까운 곳만 예를 든 이 바위들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잘 아는 바와 같이 괸 돌[支石]이라는 뜻으로 덮개돌(上石)을 떠 밭치고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고인돌’은 지석만 나타내므로 부정확한 말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이미 덮개돌과 괸 돌, 그 아래 하부구조까지 합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고인돌이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묘제라는 점에서 지석묘(支石墓)가 학술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주변의 고인돌을 보고도 미처 몰랐다는 사람들이 왕왕 있는데 아래에 괸 돌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고인돌이 강화도의 탁자식 고인돌처럼 멋있지도 않고, 땅에 그냥 마음대로 바위를 갖다놓은 것 같아 보인다. 이를 개석식(蓋石式)이라고 하니 뚜껑돌[蓋石]의 형태와 크기가 매우 다양하다.
 
그런가 하면 괸 돌이 낮은 기반식(碁盤式, 바둑판식)도 있으나 옮겨지거나 훼손되면서 괸 돌이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아 흔치는 않다.
고인돌이라고 하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화도나 전남 화순·전북 고창을 떠올리지만, 대구·경북에도 예전에는 어디 가나 쉽게 눈에 띄는 것이 고인돌이었다. 호남 다음으로 고인돌이 많고 골고루 퍼져 있는 곳을 들라 하면 대구·경북이 단연 으뜸일 것이다.
 
대구만 해도 근세까지 대구역을 중심으로 백 여 기의 고인돌이 방사형으로 늘어서 있어 고인돌의 도시로 일컬어졌고, 경주·포항·경산·영천·청도 등은 최근까지 200기 이상 고인돌이 있었다. 경작지 개간, 택지 또는 산업시설 개발, 도로 건설, 댐 축조, 개인 묘역 조성 등 여러 이유로 고인돌은 훼손, 이동되는 사례가 매우 많았다. 특히 경북은 지형적 특성상 일상 활동의 영역과 고인돌의 위치가 겹치거나 가까운 곳이 많아 불가피하게 훼손되는 일이 빈번했다. 경산도 20년 전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것이 적지 않다.

경산은 고인돌이 많이 세워진 지역 중의 하나이다. 넓은 평야가 있어 그렇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고인돌이 밀집된 곳은 의외로 금호평야가 아니라 오목천(烏鶩川) 상류 즉, 관란천 유역이다. 용성면 미산리, 곡신리, 도덕리, 고죽리, 고은리, 쟁광리 등으로서 독립적으로 있지 않고 무리를 이루어 존재한다.
 
물론 그 외 지역에도 많이 발견되니, 예를 들면 남천 상류 남천면 산전리도 과거 고인돌이 많은 곳 중 하나였다. 이러한 분포 양상은 고인돌이 세워지던 청동기시대에는 하류의 넓은 평야가 오히려 삶의 터전으로 부적합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이와 달리 용성면 일대는 관란천과 그 지류들이 형성한 산간분지가 사방으로 발달해 있어 당시 사람들이 정착해 군집을 이루면서 살기에 적합했다고 보인다. 이러한 설명은 경북 전체로 확대해 적용될 수 있다.

용성면의 고인돌 중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은 고죽리 고인돌떼이다. 영천 대창면 구지리에서 경산으로 넘어오는 길을 따라 오다가 용성면 소재지 당리리에 이르기 전 길가에 있는 한 무리의 고인돌떼를 볼 수 있다. 고인돌은 민묘(民墓)가 섞여 있는 사례가 많은데 이곳도 그러하다. 고인돌의 위치가 낮은 구릉이거나 언덕이다 보니 묘터로 많이 쓰인 것이다.
 
고죽리 고인돌떼는 원래 20기가 넘었다고 하나 현재는 반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모양과 크기가 일정하지는 않는 개석식으로서, 비교적 평평해 보이는 고인돌 중에는 둥근 홈이 여러 개 파여 있다. 이러한 성혈은 한반도의 고인돌에서 널리 발견되는 현상 중의 하나이다. 이는 분명 일정한 목적이나 용도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우리 지역의 고인돌은 보편적인 면도 지니면서 특별한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고인돌은 북유럽, 영국·프랑스, 흑해·카스피해 연안, 동남아시아, 중국 산동지방·요동 등지, 일본, 아메리카대륙 등 폭넓게 분포한다.
 
그러면서 의외로 요서지역에는 드물기도 한 고인돌은 과거에서부터 하나씩 쌓여온 우리의 정체성을 추적하는 데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선사시대의 유적이다. 고인돌이 많은 경산에서 몇 차례 고인돌을 산책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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